서울 강남의 한 카페. 흰색 벽에 나무 테이블 하나, 그 위에 놓인 에어팟과 맥북. "저는 미니멀리스트예요"라고 말하는 청년의 뒤로 보이는 것은 월세 150만 원짜리 원룸이다. 한편 지하철 반대편에서는 누군가 비닐봉지에 든 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에게 미니멀리즘은 선택지에조차 없다. 오늘날 '적게 소유하기'라는 철학적 실천이 역설적으로 계급의 표지가 되어버린 이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의 특권
미니멀리즘의 핵심은 '의도적 단순함'이다. 물질적 과잉에서 벗어나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이 태도는 분명 철학적 가치를 지닌다. 문제는 이것이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선택하려면 먼저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 좋은 가전제품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 고르는 것과, 애초에 살 여력이 없어서 갖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의 논리가 여기서 작동한다. 상류층은 자신들의 취향을 통해 다른 계급과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과거에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부의 과시였다면, 이제는 절제된 소비가 새로운 문화자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덜 가지기'를 실천하려면 경제적 안정이라는 토대가 필요하다. 좋은 물건 몇 개만 오래 쓰겠다는 결심은, 그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불안의 외주화와 소유의 정치학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사회적 배경에는 공간의 위기가 있다. 집값이 치솟고 주거 면적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정리'는 생존 전략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불평등이 숨어있다. 고급 미니멀리즘은 넓은 공간의 여백을 전제로 한다. 빈 벽면, 여유로운 동선,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 이 모든 것은 충분한 평수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반면 좁은 공간에 사는 이들에게 물건이 적다는 것은 미학이 아니라 결핍의 증거다. 같은 '비움'이라는 현상이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쪽에서는 '여백의 미'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가난의 풍경'이 된다. 소유의 최소화라는 동일한 외양이 계급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는 이 상황은, 우리 사회의 해석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드러낸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명분의 이중성
미니멀리즘은 종종 환경주의와 결합한다. 적게 소비하고, 오래 쓰고, 지속가능한 제품을 선택한다는 것. 이 실천 자체는 분명 의미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도덕적 선택으로만 소비될 때, 구조적 문제는 은폐된다. 친환경 제품은 대체로 비싸다. 유기농 면 티셔츠, 재활용 소재 가방, 에너지 효율 높은 가전제품. 이런 '착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경제적 여유의 산물이다.
환경을 생각하며 물건을 줄이는 사람과, 당장의 생계 때문에 값싼 일회용품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 사이의 간극. 전자는 윤리적 주체로 칭송받고, 후자는 무책임한 소비자로 비난받는다. 하지만 이 구도는 불공정하다. 지속가능성을 실천할 조건 자체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윤리로 환원된 환경주의는 때로 계급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다시, 비움의 철학을 묻다
그렇다면 미니멀리즘은 포기해야 할 허위의식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미니멀리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특권적 취향으로 전유되는 방식이다. 진정한 비움의 철학은 소유의 최소화를 넘어,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질문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덜 갖는 것이 누군가의 결핍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갖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기 전에, '왜 어떤 이들은 선택지 자체가 없는가'를 먼저 질문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이 단순히 라이프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 정의의 문제로 확장될 때, 비로소 그것은 계급의 표지를 넘어 진정한 철학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적게 갖는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