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말에 본 영화, 최근 읽은 책, 가족 이야기까지. 그런데 문득 상대방이 던진 질문에 순간 멈칫하게 된다. "요즘 어떤 프로젝트 하고 있어?" 대답은 신중해진다. 너무 자세히 말하자니 내 성과가 비교당할 것 같고, 너무 대충 얼버무리자니 무언가 숨기는 것처럼 보일까 봐. 이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가 어느새 나의 경쟁자로 변모했음을.
현대 사회에서 우정은 가능한가. 특히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심지어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친밀함은 존재할 수 있을까.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이미 오래전에 이 질문의 불편한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교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아도르노가 살았던 20세기 중반,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적 교환 원리가 인간관계 자체를 재편한다는 사실이었다.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파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일종의 거래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를 대할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의식중에 계산한다. 이 사람과 친해지면 내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 저 사람은 나보다 상사에게 더 인정받고 있지 않을까. 그의 성공이 나의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타인을 '등가물'로 환원한다. 친구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관리해야 할 대상, 혹은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정은 사치가 된다. 순수한 호의나 무조건적 신뢰는 순진함의 증거로 치부된다. "너무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말이 상식이 된 사회. 여기서 우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성과주의가 만든 투명한 감옥
오늘날의 상황은 아도르노가 목격했던 것보다 더 심화되었다. 성과주의는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한 숫자로 만든다. 판매실적, 논문 인용지수, 팔로워 수, 조회수. 우리의 가치는 끊임없이 평가되고 순위가 매겨진다. 그리고 이 투명한 가시성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고립시킨다.
대학원에서 같은 연구실을 쓰는 동료들을 보자. 겉으로는 서로 돕고 격려하지만, 속으로는 누가 먼저 논문을 게재하는지, 누가 교수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는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취업 준비생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스터디 그룹에서 공부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이 구조 속에서 협력은 일시적 전략일 뿐이다. 언젠가는 경쟁자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관계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아도르노가 우려했던 '도구적 이성'은 이제 인간관계의 기본 작동 원리가 되어버렸다.
우정 불가능의 시대를 살아가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쉬운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모순을 직시하라고, 이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라고 말한다. 우정이 불가능한 사회 구조를 애써 외면하며 "그래도 우리는 친구야"라고 되뇌는 것은 자기기만에 가깝다.
하지만 절망만이 답은 아니다.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더 정직한 관계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경쟁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구조에 균열을 낼 가능성이 생긴다. 동료에게 "우리 이 프로젝트에서는 경쟁자지만, 그래도 서로 존중하자"고 말하는 것. 친구에게 "나도 네가 성공하면 질투가 나지만, 동시에 축하해주고 싶어"라고 고백하는 것. 이런 정직함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강조한 '부정변증법'의 정신은 여기에 있다. 모순을 성급하게 해소하려 들지 말고, 그 모순 속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라는 것. 완전한 우정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불완전한 우정이라도 지키려는 노력이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여전히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동료는 언제든 경쟁자가 될 수 있고, 친구와의 관계도 이해관계의 그물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 냉혹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 사이의 긴장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순수하지 않아도,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아도르노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