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우리는 시계를 본다. 6시 정각. 그러나 책상 위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고, 상사의 눈치가 보인다. 결국 우리는 '조금만 더'를 반복하며 야근의 늪에 빠진다. 이 일상적 풍경 속에는 단순히 업무량의 문제를 넘어선,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숨어 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
측정 가능한 시간, 살아있는 시간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시계로 측정되는 공간화된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흐르는 '지속(durée)'이다. 전자가 균질하고 분할 가능한 시간이라면, 후자는 질적으로 변화하며 분할될 수 없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를 9시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시간을 공간처럼 쪼개어 세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그렇게 균질하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과 보낸 한 시간과 지루한 회의의 한 시간은 같은 60분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의 시간을 철저히 부정한다. 노동시간은 임금으로 환산되고, 효율은 단위 시간당 생산량으로 측정된다. 우리의 시간은 분과 초로 잘게 쪼개져 관리되고 통제된다. 야근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일하는 시간이 길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속, 즉 우리만의 고유한 시간의 흐름이 자본의 시간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신호다.
타임 푸어 시대의 역설
흥미롭게도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시간 절약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시간이 없다고 느끼는 세대다. 이메일과 메신저는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고, 재택근무는 일과 삶의 경계를 허문다. 24시간 편의점과 새벽 배송은 우리에게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언제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주었다.
이는 자본이 시간을 대하는 방식의 본질을 드러낸다. 자본에게 시간은 활용되어야 할 자원이다. 남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은 낭비이자 비효율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퇴근 시간에도 유튜브 강의를 듣고, 점심시간에도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모든 시간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그냥 흐르는 시간은 죄책감의 대상이 된다.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야근을 거부하고 칼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측정하고 관리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회복하는 일이다.
이는 비생산적인 시간을 용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무 계획 없이 산책하는 시간, 특별한 목적 없이 친구와 수다를 떠는 시간,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이런 시간들은 측정 가능한 성과를 내지 못하지만,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시간들이다. 자본의 시계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리듬에 따라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
야근하는 사회에서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결국 저항의 문제다. 효율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시간 체제에 균열을 내고, 우리만의 시간을 지켜내는 일. 그것은 작게는 정시에 퇴근하는 것에서, 크게는 일 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까지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우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살아간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