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의심하는 '나' 자신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이 코기토(cogito) 명제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을 철학의 제1원리로 세운 이 선언은 서양 근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이 확고해 보이던 '생각하는 나'는 언제부터, 왜 의심받기 시작했을까.
중세에서 근대로—'나'라는 중심의 탄생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선언한 17세기는 유럽이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이행하던 격변의 시기였다. 중세 천 년 동안 신은 모든 질서의 중심이었고, 인간은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교회가 진리를 규정했고, 개인의 이성보다 신앙의 권위가 우선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며 그리스·로마의 고전이 재발견되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가 확장되며,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과학혁명이 우주의 중심을 흔들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이 혼란 속에서 확실한 토대를 찾고자 했다. 감각은 속일 수 있고, 꿈과 현실도 구분하기 어렵다. 심지어 수학적 진리마저 악마가 나를 속이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의심하는 '나'만큼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도달한 절대적 확실성이었다. 17세기에 이런 '확고한 나'가 필요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신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인간 이성이라는 새로운 기둥을 세워야 했고, 자연을 관찰하고 지배할 주체로서의 인간이 필요했다.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려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독립된 주관이 먼저 확립되어야 했다.
코기토의 균열—언어와 주체의 문제
하지만 코기토는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니체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 자체가 이미 '나'라는 주체를 전제한다고 지적했다. 생각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 구조가 이미 주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인도유럽어의 문법은 주어-술어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생각한다"라는 동사를 쓰려면 그 앞에 "나는"이라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코기토는 발견이 아니라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일 수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다른 각도에서 공격했다.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주체가 반드시 하나의 통일된 '나'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여러 생각들이 있을 뿐이지, 그것들을 묶는 실체로서의 '나'는 추가된 가정일 수 있다. 20세기 초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정신 구조를 제시하며 '생각하는 나' 이전의 무의식 단계를 설정했다. 의식하는 나 아래에 더 근원적인 욕망과 억압의 층위가 있다면, 데카르트가 말한 투명한 자기의식은 환상이 된다.
세계와 분리된 고립된 주체
더 근본적인 비판은 데카르트가 설정한 주체의 성격 자체에 대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주체다. 의심을 통해 모든 외부 세계를 괄호 쳐버린 후에 남는 순수한 사유 주체.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 있다. 난로의 따뜻함을 지각하는 나는 난로와 이미 관계 맺고 있는 신체적 존재다. 지각을 의심하고 '지각의 관념'만 남긴다고 해서 더 확실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생한 경험을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실재와의 접촉을 잃어버린다.
마르크스는 또 다른 방향에서 비판한다. 개인은 물질적 토대와 사회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고립된 순수 이성이 먼저 있고 거기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 방식이 의식을 규정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철학적 표현일 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실상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성에서 관계성으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코기토는 어떤 의미일까. 데카르트가 찾고자 했던 절대적 확실성은 이제 거의 포기되었다. 대신 우리는 언어, 신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유동적인 주체를 말한다. SNS에서 여러 페르소나를 연기하고, AI와 대화하며, 가상현실 속에서 또 다른 자아를 경험하는 시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는 "나는 관계 맺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럼에도 코기토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확실성의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 맹목적 권위에 맞서 스스로 생각하려는 태도, 자기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비판정신. 이것들은 데카르트가 근대에 남긴 유산이다. 다만 그 '나'가 고립된 섬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속 매듭이라는 점, 투명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불투명한 존재라는 점을 이제 우리는 안다. 코기토는 의심받지만, 그 의심 자체가 철학의 진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