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돈쭐'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착한 가게나 윤리적 기업에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의미다. 환경을 생각하는 카페, 장애인을 고용한 베이커리,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가게. 이런 곳들에 지갑을 여는 것이 곧 정의의 실천이라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 가치소비, 미닝아웃, ESG 경영 같은 단어들이 미디어를 장식하고, 기업들은 앞다투어 '착한 기업' 이미지를 내세운다. 하지만 과연 소비를 통한 윤리 실천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소비자 주권의 환상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소비자 주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에게 막강한 힘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사고 사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시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매운동이나 착한 소비 캠페인이 일시적 효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개별 소비자가 실제로 가진 힘보다 훨씬 과장된 믿음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제한된 정보와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움직인다. 어떤 기업이 진정으로 윤리적인지, 어떤 제품이 정말 환경친화적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윤리적 제품은 대체로 비싸다. 여유 있는 중산층에게는 가능한 선택이 저소득층에게는 사치가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결국 '착한 소비'는 특정 계층의 도덕적 자기만족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
시장의 포섭 능력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이 가진 놀라운 포섭 능력이다. 윤리적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자 기업들은 재빠르게 이를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했다. '그린워싱'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실제로는 환경을 해치면서도 친환경적 이미지를 내세우는 기업들의 전형적인 행태다. 공정무역 인증마크를 붙인 제품이 실제로는 노동 착취를 통해 생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장은 윤리마저 상품화한다. '착한 소비'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상품이 되고, 도덕성이 프리미엄 가격의 근거가 된다. 소비자는 약간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함으로써 죄책감을 면제받고, 기업은 윤리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며 더 많은 이윤을 거둔다. 이 구조 속에서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그건 아니다. 다만 소비를 통한 윤리 실천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개인의 소비 선택은 의미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조적 불평등과 환경 파괴는 구조적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소비사회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기호와 의미라고 지적했다. 윤리적 소비 역시 하나의 기호 소비에 그칠 위험이 있다. 진정한 변화는 소비자로서의 개별적 선택을 넘어, 시민으로서의 집합적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권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 환경을 규제하는 정책,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소비 너머의 실천
'돈쭐'을 놓는 것이 나쁜 행위는 아니다. 다만 그것을 정의 실천의 전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착한 카페에 들르는 것도 좋지만,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하고, 환경 규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지지하며, 불공정한 기업 관행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실천일 수 있다.
윤리적 소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냉소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변화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시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둔감하고, 개인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 무력하다. 하지만 연대하는 시민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강력하다. 지갑을 여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목소리를 내고,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