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우리는 대개 "그냥 그렇지 뭐"라고 답한다. 이 무심한 대답 속에 2020년대 직장인들의 생존 전략이 숨어 있다. 사표를 내지는 않지만 열정을 쏟지도 않는다. 출근은 하되 몰입하지 않는다. 이른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현상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트렌드는 이제 전 세계 직장인들의 공통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현상을 단순히 Z세대의 나태함이나 책임감 부족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저항의 계보학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말레이시아 농촌을 연구하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직접 대항하는 대신 일부러 느리게 일하거나, 도구를 '실수로' 망가뜨리거나, 아픈 척하며 결근했다. 스콧은 이를 '일상적 저항(everyday resistance)'이라 명명했다. 혁명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끈질기게 지속되는 약자들의 생존 기술이었다. 조용한 퇴사는 바로 이 저항의 현대판이다. 해고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사표를 내는 대신, 계약서에 명시된 최소한의 의무만 수행한다. 초과 근무를 거부하고, 회식에 빠지고, 주말 연락에 답하지 않는다. 21세기 직장인들이 선택한 '안전한 반란'이다.
의미 없는 노동 앞에서
문제는 단순히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많은 직장인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그 일은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한 시간 거래에 불과해진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한 '불쉿 잡(Bullshit Jobs)'이 그것이다.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 쓰고, 회의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고, 실적을 위한 실적을 만들어낸다. 이런 상황에서 열정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전인격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노동력만이 아니라 열정, 창의성, 심지어 감정까지 회사에 바치길 원한다. "우리는 가족이에요"라는 회사의 구호 뒤에는 "가족이니까 희생하는 게 당연하지"라는 논리가 숨어 있다. 조용한 퇴사는 이런 착취적 요구에 대한 거부다. "나는 노동력을 팔았을 뿐, 내 영혼까지 판 것은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저항인가, 체념인가
하지만 조용한 퇴사를 낭만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것이 진정한 저항인지, 아니면 변화를 포기한 채 최소한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체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스콧이 연구한 말레이시아 농민들의 일상적 저항은 결국 지주 체제를 바꾸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조용한 퇴사 역시 직장 문화나 노동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개인을 더 고립시키고, 집단적 연대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현상을 단순히 비난할 수 없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번아웃으로 쓰러지기 전에, 우울증으로 무너지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저항이지만, 적어도 파멸을 유예하는 전략이다. 월급만큼만 일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는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마지막 신호일지도 모른다.
의미를 되찾는 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조용한 퇴사가 보여주는 것은 노동에서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공허해지는지다. 해답은 더 높은 연봉이나 복지에만 있지 않다. 물론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세상에 작은 변화라도 만든다는 감각을 원한다. 그리고 일과 삶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을 권리를 원한다.
조용한 퇴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이것이 개인의 고립된 선택에 머무르지 않고, "일이란 무엇인가" "좋은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묻는 집단적 대화로 나아가야 한다. 최소한의 저항이 최대한의 연대로 진화할 때, 우리는 비로소 월급만큼만 일하는 시대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