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깨뜨린 건 규칙이 아니라 관계였다
회식 자리에서 후배가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 날 그는 왜 팀 분위기가 이상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와 만날 때마다 늘 밥값을 내던 사람이 어느 날 더치페이를 제안했다. 그 순간 공기가 묘하게 얼어붙었다. 아무도 명시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어긋났다. 우리는 이것을 '눈치 없다'거나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말로 얼버무린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을까?
보이지 않는 선, 그리고 그것을 넘는 순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암묵적으로 학습하는 행동 양식을 '아비투스'라고 불렀다. 이는 명문화된 법칙이 아니지만, 우리 몸에 새겨진 규칙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식사 자리에서 누가 계산할지, 회의 중 누가 먼저 발언할지, 카톡 답장은 얼마나 빨리 해야 하는지. 이 규칙들은 공식 매뉴얼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지만, 어길 경우 '이상한 사람'이 된다.
문제는 이 규칙들이 투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와 함께 있느냐,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규칙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대학 동기와의 술자리에서는 더치페이가 당연하지만, 직장 선배와의 식사에서 후배가 계산대로 먼저 가는 건 실례다. 친한 친구 사이엔 반말이 자연스럽지만, 같은 나이라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 이 복잡한 규칙망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적절함'을 계산한다.
규칙이 깨지는 순간, 드러나는 것
흥미로운 건 이 규칙들이 깨졌을 때다. 평소 조용하던 후배가 회의에서 팀장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내용은 합리적이었지만, 회의 후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늘 선물을 챙기던 친구가 어느 생일부터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서운함과 함께 '우리 사이가 변한 건가' 하는 의심이 싹텄다. 이 순간들이 보여주는 건 명백하다. 우리가 지키는 건 단순한 매너가 아니라, 관계의 위계와 거리를 확인하는 의례였던 것이다.
부르디외가 주목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암묵적 규칙은 그저 편의를 위한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더 힘이 있고, 누가 배려를 베풀고, 누가 감사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장치다. 밥값을 내는 행위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내가 너보다 여유롭다' 혹은 '내가 너를 챙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호칭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 간의 사회적 거리를 측정한다. 이 규칙들을 따르는 한,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누군가 이 규칙을 어기면, 관계의 민낯이 드러난다.
좋은 의도는 왜 나쁜 결과를 낳는가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많은 경우, 규칙을 깨는 사람은 나쁜 의도가 없다. 오히려 더 평등하고 솔직한 관계를 원했을 수 있다. 후배는 수평적 소통을 원했고, 친구는 부담스러운 선물 교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밥값을 나눠 내자는 제안은 상대에게 미안함을 덜어주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왜 관계는 어색해졌을까?
문제는 일방적인 규칙 변경이다. 암묵적 규칙은 양쪽의 동의 없이는 바뀔 수 없다. 한쪽이 먼저 '이제 우리 이렇게 하자'고 선언하는 순간, 상대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동안 쌓아온 관계의 균형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상대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행동들이 무가치하게 여겨진다고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동안 밥값 낸 게 부담이었나?' '내 선물이 귀찮았나?' 이런 의심이 쌓이면 관계는 멀어진다.
규칙을 바꾸는 법, 혹은 규칙과 함께 사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합리한 규칙이라도 평생 따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건 변화의 방식이다. 암묵적 규칙을 바꾸려면, 먼저 그것을 명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 요즘 밥값 부담돼서 더치페이 어때?"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회의 때 자유롭게 의견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먼저 제안하는 것. 규칙을 깨기보다는, 새로운 규칙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혹은 규칙 자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방법도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를 일종의 게임 판으로 봤다. 게임의 규칙을 모르면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규칙을 정확히 알면, 그것을 활용할 수도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바꿀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보이지 않는 규칙들 속에서 산다. 그 규칙들은 때로 불합리하고, 때로 억압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관계가 있는 한, 규칙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중요한 건 그 규칙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내가 지금 따르는 규칙은 무엇인가? 이 규칙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나는 이 규칙을 바꾸고 싶은가, 아니면 유지하고 싶은가? 이런 질문들을 던질 때, 비로소 우리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읽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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