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친 장면. 명품 차림의 사람들이 모여 와인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는 가볍고 유쾌하다. 골프 이야기, 해외여행 계획, 자녀들의 유학 준비. 저 사람들은 분명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빌릴 것도, 부탁할 것도 없을 테니까. 우리는 흔히 이런 광경을 보며 '역시 부자들은 이기적이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이기심 때문일까?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비투스와 구별짓기: 부르디외의 통찰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소유의 차이가 아니라 '아비투스'의 차이라고 봤다. 아비투스란 특정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취향, 태도, 행동양식의 총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 몸에 각인된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말투를 쓰는지. 이 모든 것이 계급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류계급은 끊임없는 '구별짓기'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재생산한다. 그들은 단순히 비싼 것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통해 자신들과 다른 계급을 구별한다. 같은 와인을 마셔도 그것을 음미하는 방식, 이야기하는 어휘,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것이다. 그러니 부자들이 부자들끼리 모이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문화자본을 인정받고, 편안하게 자신의 아비투스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찾는 행위다.
문제는 이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무도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그저 '편한 사람들'끼리 모일 뿐이다. 하지만 이 '편안함'의 기준 자체가 계급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비슷한 동네에 살고, 자녀들을 같은 학원에 보내는 사람들. 이들 사이에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들이 있다. 반대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는 사소한 대화조차 어색해진다.
관계의 비대칭성이 만드는 무게
게오르크 짐멜은 근대 화폐경제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화폐는 관계를 객관화하고 계량화하는 도구다. 문제는 이 계량화가 관계의 균형을 가시화한다는 데 있다. 경제적 격차가 큰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고받음'의 균형이 애초에 성립하기 어렵다. 한쪽은 저녁 한 끼에 10만 원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지만, 다른 쪽에게는 한 달 식비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이 밥 먹자'는 제안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더 큰 문제는 이 비대칭성이 심리적 부채감을 낳는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없는 쪽은 상대의 호의를 받을 때마다 '갚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고급 레스토랑에 초대받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집에서 만든 음식으로 초대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동등한 보답일까? 반대로 여유 있는 쪽은 자신의 호의가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봐 조심스럽다. 너무 비싼 곳에 데려가면 상대가 불편해할 것 같고, 그렇다고 평소 자신이 가는 곳보다 격을 낮추면 그것도 실례 같다. 결국 양쪽 모두 불편해진다.
이 불편함은 단순히 경제적 차이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상호성의 원칙이 깨졌을 때 느끼는 존엄의 상실이다.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호혜성에 기반한다.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대등한 관계라고 느낀다. 하지만 한쪽이 계속 받기만 하는 관계는 은연중에 종속의 관계로 변한다. 설령 주는 쪽이 전혀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 말이다.
선물의 정치학과 동등성의 환상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원시사회의 선물 교환을 연구하며 중요한 발견을 했다. 선물은 단순한 물건의 이동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만드는 의례다. 선물에는 '주기-받기-갚기'의 삼중 의무가 따른다. 선물을 주면 상대는 받아야 하고, 받으면 언젠가 갚아야 한다. 이 순환이 관계를 지속시킨다.
하지만 이 의무는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줄 수 있고, 다른 쪽이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할 수 없다면, 이 의례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전락한다. 역사를 보면 지배계급은 항상 선물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귀족이 평민에게 베푸는 자선. 이것은 관대함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위계의 확인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이 메커니즘은 작동한다. 재벌 총수가 직원들에게 베푸는 복지, 부유한 선배가 후배에게 쏘는 저녁값. 겉으로는 선의지만, 그 안에는 권력관계가 내장되어 있다. 받는 쪽은 감사해야 하고, 충성해야 한다. 동등하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부자들끼리 모이는 것은 이 '동등성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주고받음이 균형을 이룬다. 오늘 내가 저녁을 샀으면, 다음번엔 네가 사면 된다. 별장에 초대받았으면, 나도 휴가 때 요트 여행에 초대하면 된다. 이런 관계에서는 누구도 채무자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하다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다. 누구도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상징폭력과 은밀한 배제
부르디외는 '상징폭력'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지배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은밀한 폭력이다.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위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지배방식이다.
부자들이 부자들끼리만 모이는 현상도 일종의 상징폭력이다. 그들은 '부담 주지 않기'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경제적 격차가 있으면 서로 불편할 테니, 차라리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배려 깊은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계급의 분리를 정당화한다.
더 교묘한 것은 이 배제가 명시적 차별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도 "당신은 가난하니까 우리 모임에 올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초대 명단에서 빠질 뿐이다. 같은 골프장 회원이 아니니까, 같은 학부모 모임에 속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구조적 배제는 개인의 의도나 악의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진정한 관계는 부담을 나누는 것
역설적이게도, 가장 깊은 관계는 오히려 부담을 기꺼이 떠안는 데서 시작된다. 친구가 어려울 때 돈을 빌려주고, 아플 때 간병하고,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것. 이런 관계에는 계산이 없다. 언젠가 갚을 수 있을지, 동등하게 보답받을 수 있을지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균형과 비대칭 속에서 진짜 유대가 형성된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에게 윤리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발생하는 무한한 책임감이다. 이것은 계산될 수 없고, 교환될 수 없다. 나는 타자에게 빚지고, 그 빚은 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갚을 수 없음이 관계를 지속시킨다.
부자들이 부자들끼리 모이는 것은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너무 예민한 배려 때문일 수 있다. 상대에게 부담 주기 싫다는 생각, 불편한 상황 만들기 싫다는 생각. 하지만 이 과도한 배려가 오히려 사회를 단절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담 없는 관계가 아니라, 부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용기다. 완벽한 균형과 동등성을 포기하고, 때로는 빚지고 때로는 베푸는, 그런 비대칭적이지만 따뜻한 관계 말이다.
결국 진짜 문제는 경제적 격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격차를 관계의 장벽으로 만드는 우리의 태도다.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의 차이, 구별짓기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동한다.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계급의 재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들이 부자들끼리만 모이는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고 부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폭력적인 배제가 작동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상징폭력을 통해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지금 '부담 없음'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공동체는 부담을 나누는 데서,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