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정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정상 체중, 정상 혈압, 정상 발달, 정상적인 행동. 그런데 이 당연해 보이는 '정상'이라는 개념 뒤에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권력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과연 정상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통계가 만드는 정상의 허상
현대 사회에서 정상의 기준은 대부분 통계에서 나온다. 키와 몸무게의 정상 범위, IQ 점수의 평균치, 아이들의 발달 단계별 기준점들. 이 모든 것들이 통계적 평균을 중심으로 한 정규분포 곡선 위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기 쉬운 중요한 사실이 있다. 통계적 평균이 곧 이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73cm라고 해서 이것이 가장 건강하거나 이상적인 키는 아니다. 단지 측정된 데이터들의 중간값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평균치를 '정상'으로, 그리고 정상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평균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은 곧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학이 그리는 정상 신체의 지도
의학 분야에서 정상의 개념은 더욱 구체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혈압 120/80, 체온 36.5도, BMI 18.5-24.9. 이런 수치들은 마치 인간 신체의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 기준들 역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나온 결과다.
문제는 이런 의학적 정상 기준이 종종 서구 백인 남성을 표준으로 삼아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여성의 심장병 증상이 오랫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성의 심장병 증상을 '정상적인' 심장병 증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다른 양상을 보이는 여성의 증상은 '비전형적'이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미셸 푸코는 이런 현상을 '규범적 권력'의 작동으로 설명했다. 권력은 더 이상 금지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정상'이라는 기준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스스로 그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규율은 처벌하지 않고 정상화한다. -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교육 제도 속 정상성의 강요
학교는 정상성을 내면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기관 중 하나다. 같은 나이의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아놓고, 동일한 교육과정을 통해 동일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 여기서 '정상적인' 학습 속도, '정상적인' 행동 패턴, '정상적인' 사회성이 정의된다.
ADHD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면 이런 정상성의 폭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의 다른 방식의 인지와 행동은 '장애'로 분류되고, '치료'나 '교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문제는 다름 자체를 병리화하는 경향이다.
비정상에 대한 낙인의 메커니즘
정상의 기준이 만들어지면, 자동으로 비정상의 영역도 생겨난다. 그리고 비정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사회적 낙인을 경험하게 된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겪는 편견,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장애인에 대한 시선들이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낙인이 단순히 개인의 편견 차원을 넘어서 제도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보험 가입 시 건강 상태 검사, 취업 시 신체검사, 각종 자격증 취득 시 결격 사유 규정 등. 사회 시스템 자체가 '정상'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상을 넘어서는 사유
그렇다면 우리는 정상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할까? 그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의학적 진단 기준이나 교육 과정의 표준화는 나름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상의 정치적 성격을 인식하고, 그것이 절대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다.
정상의 권력을 해체하는 첫걸음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평균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다른 방식의 존재와 사고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한 정상의 기준이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결국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경계선 자체를 의심하고, 더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상의 폭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다양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길, 바로 여기에 우리 시대의 과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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