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는데, 막상 사귀고 나니 별로예요."
상담 코너에 올라온 이 한 줄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카톡 한 줄에 하루 종일 행복했던 짝사랑 시절.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던 그때. 하지만 막상 사귀고 나니 "이게 뭐지?" 싶은 허탈함. 이 감정의 낙차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자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는 진짜로 사랑했던 걸까?"
결핍이 만드는 사랑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의 본질을 '결핍'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그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대상 자체보다 '대상을 향한 거리'에서 힘을 얻는다.
짝사랑의 구조를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불확실성.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긴장감. "만약 사귄다면 우리는..."이라는 끝없는 상상. 이 모든 '알 수 없음'이 욕망을 증폭시킨다. 친구에게 "어제 그 사람이랑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어"라고 말하며 2분짜리 에피소드를 20분 동안 분석한다.
그런데 막상 사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 결핍이 사라진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욕망의 대상이 실제 대상으로 전환되는 순간, 욕망은 충족이 아니라 소멸을 맞이한다.
강남의 한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하기 위해 3개월을 기다렸다고 생각해보자.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그 식당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인스타그램 사진을 들여다보고, 후기를 찾아 읽으면서 기대는 극대화된다. 하지만 막상 가서 먹어보면 "음... 이 정도?" 싶다. 음식 자체의 맛보다 '3개월을 기다린 나의 시간'이 만들어낸 기대가 더 컸던 것이다.
미스터리가 사라지면 매력도 증발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과 질투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는 사랑이란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알 수 없는 부분'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봤다.
짝사랑할 때 그 사람의 일상은 미스터리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주말에는 누구를 만날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이 알 수 없음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매력을 만든다.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확대해가며 배경을 분석하고, "이 카페는 어디지?" 검색한다.
하지만 사귀고 나면 그 사람의 일상이 투명해진다. 주말에 뭐 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어떤 유튜브를 보는지 다 안다. 어제 저녁에 치킨 먹었다는 것도 알고, 지금 화장실 간다는 것도 안다. 미스터리는 사라지고 일상만 남는다. 프루스트가 말한 '알 수 없는 부분'이 소진되는 것이다.
평범한 나뭇가지에 쌓인 소금 결정
19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사랑론』에서 '결정화 작용'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소금 광산을 방문했을 때 관찰한 현상을 기록했다. 광산에 나뭇가지를 던져놓으면 시간이 지나며 소금 결정이 붙어 반짝이는 보석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짝사랑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모든 특징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말을 조용히 하면 '차분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보인다. 농담을 잘 못 하면 '진지하고 깊이 있는 사람'이 된다. 답장이 늦으면 '바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평범한 나뭇가지에 우리의 환상이라는 소금 결정이 덧입혀진다.
하지만 사귀고 나면 이 결정이 녹아내린다. 말이 없으면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농담을 못 하면 '센스 없는 사람'이 되고, 답장이 늦으면 '성의 없는 사람'이 된다. 같은 특징인데 해석이 정반대가 된다. 변한 건 상대가 아니다. 우리의 '결정화'가 변한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원했을까, 사랑하는 나를 원했을까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은 또 다른 각도에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독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반에서 인기 많은 아이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매력적이어서일까, 아니면 '다들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하게 된 걸까. 짝사랑할 때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나'를 욕망한다.
친구에게 "나 누구 좋아해"라고 말할 때의 설렘. 그 사람 이름이 대화에 나올 때의 두근거림. 혼자 연애 상상을 하며 웃을 때의 행복감. 이 모든 감정이 실제 상대방보다는 '사랑하는 주인공으로서의 나'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 짝사랑 서사의 주인공인 내 자신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사귀게 되면 이 모든 서사가 사라진다. 더 이상 짝사랑의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연애를 하는 사람이 된다. 드라마는 끝나고 일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실망한다.
이미지는 실제를 견딜 수 없다
장 보들리야르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실제가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말했다. 인스타그램을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피드를 보면서 "이 사람 멋있다"고 생각한다. 근사한 카페 사진, 해외여행 사진, 책 읽는 사진. 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집에서는 배달음식 먹으며 유튜브만 본다. 피드는 선택적으로 편집된 이미지였다.
짝사랑할 때 우리가 만드는 상대방의 이미지도 이와 같다. 제한된 정보로 완벽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몇 번의 대화, SNS 게시물, 친구에게 들은 소문. 이런 파편적 정보로 하나의 완결된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사랑한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이미지처럼 완벽할 수 없다. 밥 먹을 때 소리를 내고, 기분 나쁠 때 짜증을 내고, 주말에는 게으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얼굴이 붓고, 감기 걸렸을 때 콧물을 훌쩍인다. 보들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실제와 만나는 순간 붕괴한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은 없는 걸까
여기까지 읽으면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랑이 환상이라면, 진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우리는 평생 환상을 쫓다가 실망하고, 다시 새로운 환상을 찾는 것을 반복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자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짝사랑의 열정이 식은 후, 상대방의 결점을 알게 된 후, 환상이 깨진 후. 그럼에도 그 사람과 함께 현실을 만들어가기로 선택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환상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식었다"며 관계를 끝낸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짝사랑을 시작하면서 환상의 단계로 돌아간다. 이 패턴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평생 '짝사랑의 감정'만 경험하고 '진짜 사랑'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당신이 경험한 감정의 변화는 거짓 사랑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환상적 사랑에서 현실적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턱에 서 있다는 신호다. 지금 느끼는 무료함이나 실망감이 '관계를 끝낼 신호'인지, 아니면 '진짜 사랑을 시작할 출발점'인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욕망의 구조를 알면 달라지는 것
이 철학적 분석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점은 이것이다.
첫째, 짝사랑의 감정이 식는 것은 정상이다.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변한 것도 아니다. 욕망의 구조가 원래 그렇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보라. "나는 상대방을 사랑했나, 아니면 사랑하는 나의 상태를 사랑했나?"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열쇠다. 만약 후자라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셋째, 지금의 무료함을 성급하게 '사랑의 종말'로 해석하지 마라. 환상이 깨진 후에도 그 사람과 함께 현실을 만들어갈 의지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 답을 찾는 시간을 가져라.
결국 당신이 사랑한 것은 '상대방'이기도 하고 '사랑의 감정'이기도 하다. 둘 다 맞다. 중요한 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다. 환상이 깨진 후에도 그 사람과 함께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새로운 환상을 찾아 떠날 것인가.
철학은 여기까지만 안내할 수 있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
© 2025 아트앤스터디 + claude.ai, CC BY 4.0
이 저작물은 카피레프트(Copyleft) 정신을 따르며, 출처 표시만 하면 누구나 복제, 배포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