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타임라인은 이미 분노로 들끓고 있다. 누군가의 실언, 어떤 기업의 부적절한 광고, 정치인의 망언. 손가락은 자동으로 움직여 분노 이모티콘을 누르고, 댓글 창에는 "이건 진짜 아니지"라는 문장이 타이핑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거대한 분노의 생산-유통-소비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다.
온라인 분노문화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플랫폼 자본주의가 설계한 정교한 감정 착취 시스템이며, 우리의 주의력과 시간을 수익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작동하여, 우리가 스스로 분노를 선택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분노의 순환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사용자의 체류 시간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되었고, 연구 결과들은 일관되게 분노와 혐오 콘텐츠가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페이스북 내부 문서가 폭로했듯이, 플랫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익 구조상 분노를 증폭시키는 알고리즘을 유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는 '욕망하는 기계'의 전형적 사례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분노 욕망을 포착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더 큰 욕망을 생산한다. 한 건의 분노 게시물은 유사한 수십 개의 게시물로 이어지고, 우리는 끝없이 스크롤하며 분노를 소비한다.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으며, 바로 그 불만족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연료가 된다.
집단 정체성의 무기화
온라인 분노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 집단 정체성의 문제로 전환된다. '우리 편'과 '저쪽 편'의 구분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분노는 소속감을 증명하는 통행증이 된다. 특정 이슈에 대해 충분히 분노하지 않으면, 당신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될 위험에 처한다. 이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의 역설적 현상이다.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된 자리에, 분노를 매개로 한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연대가 들어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분노 기반 연대가 실질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기보다는, 끝없는 적대의 재생산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분노함으로써 무언가를 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플랫폼의 참여 지표만 높이고 있을 뿐이다.
분노의 정동 경제학
철학자 사라 아메드는 감정이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축적되는 방식을 분석하며, 분노가 어떻게 '끈적끈적한(sticky)' 대상에 달라붙어 응집력을 형성하는지 보여준다.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대상은 반복적인 분노의 타깃이 되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부정적 정동이 축적된다. 한 번 '분노할 만한 대상'으로 규정되면, 그 사람이나 집단의 모든 행위는 분노의 렌즈를 통해 해석된다.
이는 단순한 편견을 넘어선다. 분노는 그 자체로 쾌락을 동반한다. 정의로운 분노를 표출할 때 우리는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이 알고리즘의 수익 구조와 결합할 때, 우리는 중독적 분노 소비의 악순환에 빠진다.
탈출구를 찾아서
온라인 분노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시스템 자체가 우리를 끌어들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이 메커니즘을 인식할 수 있다. 분노를 느낄 때, 그것이 정말 나의 판단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제공한 자극에 대한 반응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분노를 집단 행동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온라인 분노가 단순한 정동의 소비로 끝나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적 압력과 제도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분노의 공장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치적 주체가 되는 길이다.
클릭 한 번의 분노는 쉽다. 하지만 그 분노를 의미 있는 변화로 만드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