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진짜 좋던데, 너도 꼭 봐"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도 같은 감동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일까. SNS에 맛집 사진을 올리며 "여기 진짜 맛있어요"라고 쓸 때, 우리는 그저 개인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은연중에 "당신도 이걸 좋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까.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타인의 동의를 구한다. 이 모순적 현상을 18세기 철학자 칸트는 '취미판단'이라는 개념으로 정교하게 분석했다.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이어야 하는 판단
칸트는 취미판단이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말한다. 먼저 취미판단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이 그림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객관적 속성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의 크기나 색상은 측정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감상자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쾌감의 경험이다.
그러나 동시에 취미판단은 보편성을 요구한다. "이 음악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지 "나는 이 음악이 좋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고, 적어도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기대한다. 이것이 칸트가 포착한 핵심적 역설이다. 취미는 개인의 감정에 기반하면서도, 타인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요구한다.
무관심성의 만족이라는 조건
그렇다면 왜 취미판단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칸트는 진정한 취미판단은 '무관심적 만족'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순수하게 느끼는 쾌감을 의미한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것은 취미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생리적 욕구의 충족이다. 비싼 그림을 보며 "저걸 사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취미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실용적 관심에서 나온 판단이다.
반면 꽃을 보며 그저 아름답다고 느낄 때, 그 꽃을 소유하고 싶다거나 꽃가루가 필요하다는 생각 없이 순수하게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서 쾌감을 느낄 때, 비로소 취미판단이 성립한다. 이러한 무관심적 태도는 개인의 특수한 욕구나 이익을 배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같은 판단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감성의 차원에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통감이라는 이상
칸트는 이를 '공통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공통감은 모든 인간이 잠재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감성적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도 이 공통감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취향의 불일치는 때로 불편한 감정을 낳는다. 친구가 추천한 영화를 보고 "별로던데"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 연인이 좋아하는 음악에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기 조심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취향은 갈라진다. 어떤 이는 미니멀리즘 건축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어떤 이는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선호한다. 힙합을 사랑하는 이가 있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 칸트의 이론은 이상적이지만, 실제로는 문화적 배경, 교육 수준, 개인적 경험이 취향을 크게 좌우한다. 그럼에도 칸트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취향의 보편성을 믿고 싶어 하고, 타인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취향의 정치학
오늘날 취향은 단순한 개인의 선호를 넘어 정체성의 문제가 되었다. 인스타그램 피드는 취향의 전시장이고, 왓챠나 넷플릭스의 평점은 취향의 데이터베이스다. "좋아요"와 "공유하기"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제시하고 동의를 구한다. 칸트가 말한 취미판단의 보편성 요구는 SNS 시대에 더욱 증폭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취향의 파편화도 심화되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 안에 가두고, 취향의 차이는 때로 적대로 번진다.
칸트의 취미판단론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취향은 정말 주관적이기만 한가, 아니면 어떤 보편적 기준이 있는가. 우리는 왜 타인도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기를 바라는가. 취향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을 넘어,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게 된다. 결국 취향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