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홈화면 앞에서 30분째 고민하고 있는 당신. 결국 선택한 건 예전에 봤던 드라마 재방송이다. 이 평범한 일상 속 순간에 20세기 최고의 문화이론가 두 명이 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발터 벤야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동료였지만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던 이들의 논쟁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넷플릭스는 거대한 세뇌 공장이다"
아도르노에게 넷플릭스는 전형적인 '문화산업'의 산물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넷플릭스의 개인화된 추천 시스템? 아도르노는 이를 '의사개별화'라고 불렀을 것이다. 겉으로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획일화된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장치라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도구다. 넷플릭스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콘텐츠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예측 가능한 결말을 제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같은 패턴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진단이다.
벤야민의 기술복제론: "넷플릭스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다"
반면 벤야민은 기술의 발전이 문화의 민주화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그의 유명한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주장한 것처럼, 기술복제는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누구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든다. 넷플릭스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혁명적인 매체다.
과거에는 영화관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영화를, 이제는 집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넷플릭스는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의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것도 이런 기술적 매체의 힘 덕분이다. 벤야민이라면 이를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벤야민은 또한 기술복제가 수용자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한다고 보았다. 넷플릭스의 인터랙티브 콘텐츠나 시청자 평점 시스템은 수동적인 관객을 능동적인 참여자로 바꾸는 장치들이다. 이는 전통적인 예술 향유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문화 경험을 만들어낸다.
두 관점의 현재적 의미: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현재의 디지털 문화는 아도르노의 우려가 맞을까, 아니면 벤야민의 낙관이 맞을까? 아마도 답은 둘 다일 것이다. 넷플릭스는 분명히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거대 기업이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분석해 더 많은 시간을 플랫폼에 머물게 만들려 한다. 이는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넷플릭스는 전에 없던 문화적 다양성과 접근성을 제공한다. 인도의 독립영화부터 북유럽의 실험적 드라마까지, 과거라면 평생 접할 수 없었을 콘텐츠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는 벤야민이 꿈꾸었던 기술을 통한 문화의 민주화가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이 기술을 바라보고 활용하느냐다. 넷플릭스 앞에서 30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익숙한 콘텐츠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아도르노가 경고한 문화산업의 함정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반면 새로운 장르나 다른 문화권의 작품에 도전한다면, 벤야민이 말한 기술의 해방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선택의 과부하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오히려 선택을 어렵게 만들고, 결국 익숙한 것으로 회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딜레마 속에서도 우리는 능동적인 문화 소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아도르노의 비판적 시각과 벤야민의 낙관적 전망, 둘 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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