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유럽의 대학가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논쟁 중 하나가 있었다. 바로 '신의 본성'을 둘러싼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의 대립이었다. 이들의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 문제를 넘어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고민하는 핵심 질문에 닿아있다. 과연 인간은 이성으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의지와 감정으로 살아야 하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지능 시대에 감정의 가치는 무엇인가? 합리적 선택과 직관적 판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두 중세 철학자의 논쟁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아퀴나스: 신의 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였지만, 동시에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시켜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로 불린다. 아퀴나스에게 신은 무엇보다 '완전한 이성'의 존재였다.
아퀴나스는 신의 이성이 의지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신은 먼저 무엇이 선한지를 이성으로 인식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수학 문제를 풀 때 먼저 논리적으로 답을 구한 다음에 그 답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덕적 선악도 신의 자의적 결정이 아니라 이성적 질서에 따라 결정된다. 살인이 악한 것은 신이 임의로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볼 때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도 이성을 통해 선악을 분별할 수 있고, 이성적 사고가 올바른 삶의 기초가 된다.
현대로 치면 아퀴나스는 '과학적 합리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감정보다는 논리를, 충동보다는 계산을 신뢰했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AI가 인간의 직관을 대체하려는 시도들도 아퀴나스적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코투스: 신의 의지가 모든 것을 창조한다
둔스 스코투스(1266-1308)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으로, 아퀴나스와는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에게 신은 무엇보다 '절대적 의지'의 존재였다. 스코투스는 신의 의지가 이성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신은 먼저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이성으로 정당화한다. 즉, 신이 어떤 것을 선하다고 의지했기 때문에 그것이 선한 것이지, 이성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신이 그것을 의지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만약 신이 '거짓말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그 순간 거짓말이 선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코투스는 신이 실제로 그런 명령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스코투스의 철학은 개별성과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각 개체가 가진 고유한 특성인 '개별성'을 중시했고, 이것이 후에 개인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또한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인간의 선택과 결단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스코투스는 '실존주의자'의 원형에 가깝다. 이성적 계산보다는 주체적 선택을, 보편적 법칙보다는 개별적 상황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키르케고르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현대적 의미: 알고리즘 vs 직관의 시대
두 철학자의 논쟁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려는 시대에, 우리는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의 질문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아퀴나스적 관점에서 보면, 빅데이터와 AI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을 보완하는 도구다. 복잡한 정보를 종합하여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감정이나 편견에 휘둘리는 인간보다 알고리즘이 더 나을 수 있다. 의료 진단, 금융 투자, 범죄 수사 등에서 AI가 보여주는 성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반면 스코투스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직관과 감정에는 알고리즘이 포착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예술 창작, 사랑, 우정 같은 영역에서는 합리적 계산보다 주관적 판단이 더 중요하다.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규칙을 뛰어넘는 창의적 결단이 필요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생각해보자. 방역 당국은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해야 했지만, 동시에 시민들의 심리적 상태와 사회적 맥락도 고려해야 했다. 순수한 의학적 합리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
통합의 가능성: 이성과 의지의 조화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의 논쟁은 700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지만, 현대의 우리에게는 이 둘을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이성과 의지, 머리와 가슴, 알고리즘과 직감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이 제시한 '시스템 1'과 '시스템 2' 개념도 이와 유사하다. 시스템 1은 빠르고 직관적인 사고이고, 시스템 2는 느리고 논리적인 사고다. 둘 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아퀴나스처럼 이성의 힘을 믿고 체계적으로 사고할 것인가, 스코투스처럼 의지의 자유를 믿고 주체적으로 결단할 것인가. 아니면 둘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며 상황에 맞게 선택할 것인가.
두 중세 철학자의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