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SNS에 자신의 일상을 끊임없이 기록한다. 또 누군가는 자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고, 어떤 이는 거대한 건축물에 자신의 흔적을 새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영속성에 집착하는가? 100년도 채 살지 못할 존재가 천 년을 바라보는 이 역설적 욕망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영속성 추구의 이중성
인간의 영속성 추구는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언젠가 사라질 존재임을 아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남기려' 한다. 위대한 업적, 자식, 작품, 심지어 묘비명까지. 이 모든 것은 '나는 여기 있었다'는 외침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시도는 종종 현재의 삶을 희생시킨다. 미래의 명성을 위해 지금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후대의 평가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한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영속성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끝이 있는 삶이 '덜 의미 있다'고 착각한다. 마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 이는 논리적 오류다.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영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곧 질 것이기 때문 아닌가?
유한성이 만드는 의미
실존주의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해 급진적인 답을 제시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단순히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 조건으로 보았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우리의 선택은 무게를 갖는다. 만약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오늘 하지 않은 일을 내일 해도, 내년에 해도, 백 년 뒤에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에, 우리는 무엇을 할지, 누구와 함께할지, 어떻게 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더욱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시지프. 이 부조리한 반복 속에서도 카뮈는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속적인 성과 없이도,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바위가 정상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밀어 올리는 그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다.
새로운 영속성의 발견
그렇다면 유한한 삶 속에서 영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한가? 역설적이게도, 답은 '아니다'이다. 다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속성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그것은 물리적 흔적이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영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파급효과, 관계 속에서 전달되는 가치, 삶의 태도로서의 영속성이다.
한 교사가 학생에게 전하는 통찰,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주는 삶의 태도, 예술가가 작품에 담아내는 진실. 이것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을 수도,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다시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연쇄 속에서 진정한 영속성이 발생한다. 기념비는 풍화되지만, 삶의 질문은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결국 유한한 삶에서 영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의미 있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영속성을 상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개인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것은 헛된 집착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영속성은 실재한다. 그것은 시간의 축적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온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