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아무 조건 없이 50만 원이 통장에 입금된다면? 기본소득 논쟁이 뜨거운 이유는 단순하다. 일자리는 사라지는데 살아가야 할 사람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챗GPT가 글을 쓰고, 자율주행 트럭이 화물을 나르는 시대, '일해서 먹고사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할까?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말한다.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21세기의 도덕적 의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노동과 소득의 연결, 당연한가?
우리는 '일한 만큼 받는다'는 원칙을 당연하게 여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야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원칙에는 전제가 숨어 있다. 모든 사람이 일할 기회를 가진다는 전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편의점 알바 자리 하나에 수십 명이 지원서를 낸다. 대졸 신입이 중소기업 생산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다면, '노동 없이는 소득도 없다'는 원칙은 오히려 잔인한 선고가 된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과연 모든 소득이 노동의 대가일까? 삼성 주식을 가진 사람은 잠자는 동안에도 배당금을 받는다. 강남의 건물주는 월세로 생활한다. 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의 부가 온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도로, 전기, 인터넷, 그리고 수백 년간 축적된 과학기술. 이 모든 공유자원 위에서 우리는 경제활동을 한다.
실질적 자유라는 철학적 근거
벨기에의 정치철학자 필립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을 '실질적 자유'의 관점에서 옹호한다. 그에게 자유란 단지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갖춰져야 진정한 자유다. 아파트를 살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돈이 없으면 그 자유는 공허하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의 재원을 공유자원에 대한 권리로 설명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자연자원, 축적된 지식과 기술, 사회 인프라는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나오는 이익 역시 공정하게 나눠져야 한다. 그의 책 『21세기 기본소득』은 이러한 철학적 토대 위에서 기본소득이 단순한 복지정책을 넘어 정의의 문제임을 역설한다.
기술 변화와 새로운 정의의 필요
하지만 철학적 근거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도덕적 필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핵심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정말로 사람들이 게을러지지 않을까? 핀란드의 2년간 실험은 기본소득 수급자들이 오히려 더 행복해하고 창조적인 일을 시도했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하지만 2년의 실험으로 장기적 효과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둘째, 재원 문제다. 판 파레이스는 기존 복지제도를 재조정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보다 적은 복지 급여는 폐지하고, 많은 급여는 기본소득 수준으로 낮추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계층의 반발을 불러온다. 정치적 실현 가능성이라는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다.
셋째, 노동의 의미 문제다. 일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만이 아니다. 일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자아를 실현하며, 존엄을 확인한다. 기본소득이 이러한 노동의 의미를 대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일, 예를 들어 예술 활동이나 돌봄 노동, 지역 공동체 활동 같은 비시장적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계기가 될까?
기본소득은 도덕적 필연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선택의 문제에 가깝다. AI와 자동화가 가속화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길 앞에 서 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구제 대상으로 보며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시민의 권리로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 참여를 모색할 것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무엇을 정의롭다고 믿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기본소득 논쟁은 결국 우리 시대의 정의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