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코밍을 하러 가는 대학생들이 각자 차를 타고 온다. 쓰레기는 줍지만 탄소는 배출한다. 어느 날 한 학생이 계산한다. "우리가 주운 쓰레기보다 배출한 탄소가 더 많을걸?" 이 질문 앞에서 동아리는 침묵한다. 카풀을 제안하지만 실천은 안 된다. 결국 참여율이 떨어지고, 6개월 후 동아리는 해체된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동아리의 실패담이 아니다. 우리 시대 모든 실천이 마주하는 근본적 딜레마다.
완벽주의의 덫
완벽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현대인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논리다. SNS에서 누군가 플라스틱 빨대를 거부했다고 올리면, 댓글에는 "너 스마트폰은 쓰잖아. 그거 만들 때 탄소 얼마나 나오는데"라는 반박이 달린다. 채식주의자에게는 "너 입은 옷도 공장에서 만들었잖아"라는 지적이 따라온다. 이런 논리는 언뜻 냉철해 보이지만, 실은 모든 실천을 무력화시키는 독이다.
이 논리의 핵심은 순수성의 요구다. 완벽하게 일관된 삶만이 정당하다는 생각. 하지만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완벽한 순수성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입는 옷, 먹는 음식, 타는 교통수단 모두가 거대한 생산-유통-소비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 이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불완전함을 이유로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하는가.
체제 안에서의 모순
20세기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 딜레마를 정확히 짚어냈다. 그는 현대사회를 잘못된 전체, 즉 근본적으로 왜곡된 시스템으로 보았다. 이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완벽한 윤리적 삶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짓된 전체 속에서 진정으로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은 환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허무주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아도르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윤리적 실천의 포기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었다. 체제 자체가 문제라면, 개인의 완벽한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순을 인식하면서도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다.
환경동아리 학생들이 차를 타고 비치코밍을 간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하지만 이 모순이 그들의 실천을 무의미하게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 쓰레기를 줍는 행위는 단순히 해변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환경 문제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관심의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실천
불완전한 실천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오히려 완벽주의야말로 실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다. 차를 타고 가서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집에 앉아서 "저런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게 더 편하다. 하지만 전자는 적어도 무언가를 시도한 것이고, 후자는 자기 무행동을 합리화한 것일 뿐이다.
실천의 가치는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성에 있다. 비치코밍 동아리가 해체된 것은 그들의 실천이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완벽주의의 논리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계속한다"고 선언했다면 어땠을까. 카풀이 어렵다면 대중교통 노선을 고려해 장소를 바꾸거나, 온라인 캠페인을 병행하거나, 아니면 그냥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중요한 것은 인식이다. 자신의 실천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것. 이 태도가 오히려 더 정직하다. 왜냐하면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는 대신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도 차를 타고 온다"는 고백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교통 시스템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 인식이 더 큰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계속 질문하는 태도다.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불완전한 선은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만이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가능한 유일한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