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누군가의 갑질 영상이 올라온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댓글창은 비난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다. 부동산 가격이 또 올랐다는 뉴스에 청년들은 허탈해한다. SNS에는 체제 비판 게시물이 쏟아진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변화를 위한 구체적 행동보다는 다시 취업 준비와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이 기묘한 모순은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 문제를 알고 있고,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는 이러한 현상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옳다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저항할 수 없는 힘이라고 확신시키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보자. 청년 세대는 헬조선을 외치면서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비정규직의 고통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무한경쟁에 뛰어든다. 부동산 투기를 비난하면서도 집값이 오르면 안도한다. 이것이 위선이나 이중성 때문일까.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만든 반성적 무기력의 증상이다. 우리는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냉소는 어떻게 체제를 유지하는가
피셔가 포착한 핵심은 냉소적 거리두기의 역설이다. 현대인은 자본주의를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양극화를 개탄하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토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냉소가 오히려 자본주의를 유지시킨다. 마치 학교 조례시간의 교장 훈화처럼,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지만 조례는 계속되는 것과 같다.
한국의 2030세대를 보라. SNS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밈과 패러디로 기득권을 조롱한다. 그러나 정작 대안을 묻는 순간 침묵한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로 스스로를 검열한다. 차라리 북한으로 가라는 냉소적 반응이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작동 방식이다. 체제는 비판을 허용하고 심지어 장려하지만, 그 비판이 실천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대안적 상상력 자체를 차단한다.
상상력의 빈곤을 넘어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다. 기후위기 영화는 넘쳐나지만, 자본주의 없는 세상을 그린 영화는 찾기 힘들다. 종말 이후의 디스토피아는 상상할 수 있어도, 다른 경제 체제는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피셔가 말한 상상력의 빈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피셔는 먼저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체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보이게 만드는 것,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주 52시간 노동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고, 국민건강보험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변화는 작은 균열에서 시작된다. 피셔가 주목한 것은 집합적 상상력의 회복이었다. 개인의 자기계발이 아니라 구조의 변화를, 적응이 아니라 저항을, 체념이 아니라 연대를 상상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존재한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연대,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청년들, 주거권을 외치는 세입자 운동. 이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분노는 변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분노가 냉소로 전락하는 순간, 그것은 체제 유지의 도구가 된다.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가, 아니면 바꿀 수 없다고 믿도록 길들여진 것인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첫걸음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다시 상상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현실주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