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이 한마디는 그에게 유대교 공동체로부터의 파문(헤렘, cherem)을 안겼고, 이후 수백 년간 "위험한 무신론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생전에 출판한 저서는 단 한 권뿐이었고, 주저인 『에티카』(Ethica, 1677)는 사후에야 빛을 보았다. 렌즈를 깎아 생계를 유지하며 조용히 사유한 이 네덜란드의 철학자가, 왜 지금 다시 소환되고 있는가? 들뢰즈는 그를 "철학자들의 왕자"라고 불렀고,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그에게서 현대 뇌과학의 선구자를 발견했으며, 기후위기 시대의 생태철학자들은 그의 존재론에서 새로운 윤리의 토대를 찾고 있다.
이 모든 소환의 근저에는 하나의 공통된 직감이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계관의 기본 틀 — 정신과 신체의 분리, 인간과 자연의 분리, 이성과 감정의 분리 — 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스피노자는 바로 이 분리들이 처음부터 허구였다고 주장한 철학자다.
1. "신 즉 자연" — 스피노자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스피노자를 둘러싼 가장 뿌리 깊은 오해는 그가 신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정반대에 가깝다. 스피노자는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신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했다. 『에티카』 제1부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Deus)은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인격적 창조주가 아니다. 신은 곧 자연이며,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의 표현이다. 나무 한 그루, 파도 하나, 인간의 기쁨과 슬픔, 은하의 운동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실체(substantia)가 스스로를 펼쳐내는 양태(modus)다.
이것이 왜 급진적인가? 전통적 종교관에서 신과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 신은 초월적 존재이고 세계는 그 아래 놓인 피조물이다. 이 구도에서 자연은 인간이 이용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스피노자는 이 위계를 정면으로 해체했다. 자연은 신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 그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다.
기후위기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이 통찰은 놀라울 정도로 시의적이다. 우리가 자연을 "자원"으로, 동물을 "식량"으로, 생태계를 "서비스"로 환원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분리에 기반해 있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이 분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2. 정신과 신체는 하나다 — 데카르트를 넘어서
서양 근대 철학의 출발점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였다. 이 명제와 함께 확립된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 — 정신과 신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실체라는 생각 — 은 이후 서양 사상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이성은 높고, 감정과 신체는 낮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하는 정신이며, 신체는 정신이 거주하는 일종의 기계다.
스피노자는 이 이원론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에티카』 제2부에서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동일한 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슬픔은 단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동시에 신체의 역량이 감소하는 사건이며, 기쁨은 단지 "기분"이 아니라 신체의 역량이 증대하는 사건이다.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 두 측면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일상에서 생각해 보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이 아프고, 운동을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며, 우울할 때 몸이 무겁고, 사랑에 빠지면 온몸에 에너지가 넘친다.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제도와 담론은 여전히 이원론적이다.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을 별개로 취급하는 의료 체계, 감정을 "비이성적"이라 폄하하는 의사결정 문화,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로 신체적 조건을 무시하는 태도 — 이 모든 것이 데카르트적 분리의 유산이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가 『스피노자의 뇌: 기쁨, 슬픔, 느낌의 뇌과학』(Looking for Spinoza: Joy, Sorrow, and the Feeling Brain, 2003)에서 스피노자를 현대 감정 신경과학의 선구자로 호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마지오는 감정이 이성적 판단의 방해물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는데, 이것이 스피노자가 350년 전에 철학적으로 논증한 것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이다.
3. 감정의 기하학 — 우리는 왜 이렇게 느끼는가
『에티카』의 정식 제목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에티카』(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유클리드 기하학의 형식으로 썼다. 정의, 공리, 정리, 증명의 형태로 인간의 감정과 행위를 분석한 것이다. 얼핏 냉정해 보이지만, 스피노자의 의도는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에티카』 제3부 서문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의 감정을 마치 자연현상 — 선, 면, 물체 — 을 다루듯이 다루겠다고. 대부분의 도덕철학이 감정을 통제하거나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스피노자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했다. 분노, 질투, 사랑, 공포 — 이것들은 도덕적으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에서 파악해야 할 자연적 현상이다.
이 관점은 오늘날 심리치료의 핵심 원리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인지행동치료(CBT)든, 수용전념치료(ACT)든, 현대 심리치료의 출발점은 감정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원인과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다. 스피노자가 17세기에 한 작업을 21세기 심리학이 실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스피노자의 감정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코나투스(conatus)"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역량을 증대하려는 근본적 노력을 한다. 기쁨(laetitia)은 이 역량이 증대될 때 느끼는 것이고, 슬픔(tristitia)은 역량이 감소할 때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기쁨의 원인에 대한 인식과 결합된 기쁨이고, 미움은 슬픔의 원인에 대한 인식과 결합된 슬픔이다.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명쾌하다. 감정은 우리 존재의 역량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다.
SNS에서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느끼는 묘한 불쾌감, 운동 후 느끼는 상쾌한 성취감,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느끼는 활기 — 스피노자의 틀로 보면 이 모든 감정은 자신의 역량이 감소하거나 증대하고 있다는 신호인 것이다. 감정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어떤 만남과 관계와 활동이 나의 역량을 증대시키는지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윤리적 삶이다.
4. 자유란 무엇인가 — 욕망의 주인이 되는 법
스피노자는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를 부정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에티카』 제1부에서 스피노자는 자연 안의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연쇄 속에 있으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스피노자의 유명한 비유를 빌리면, 공중에 던져진 돌이 의식을 가진다면, 자기가 스스로 날아간다고 믿을 것이다.
이것은 숙명론이 아닌가? 스피노자의 답은 미묘하다. 그에게 자유는 원인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인식이다. 나를 움직이는 욕망과 감정의 원인을 명확히 이해할수록, 나는 그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능동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된다. 자유는 원인의 부재가 아니라 원인의 이해에 있다.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에 둘러싸인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자. 유튜브가 추천하는 영상을 "자발적으로" 시청하고, 인스타그램이 보여주는 광고를 "자유롭게" 클릭하며, 쿠팡의 추천 상품을 "스스로" 결정해 구매한다. 이때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스피노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의 욕망을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알고리즘은 당신의 과거 행동 데이터를 분석하여 당신의 욕망을 예측하고 자극한다. 당신이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당신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된 대로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 영상을 보고 싶은지, 왜 이 물건을 사고 싶은지, 왜 이 사람에게 화가 나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 그 욕망은 나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힘에서 내가 평가하고 조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적 감정(actio)"의 상태이며, 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스피노자는 해방이라 불렀다.
5. 스피노자가 지금 소환되는 진짜 이유
스피노자가 21세기에 다시 절실해진 이유를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심신이원론의 붕괴 시대에 대안적 존재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대 신경과학,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 정동 이론(affect theory)은 모두 정신과 신체의 분리가 허구임을 확인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 통찰을 350년 전에 체계적으로 논증한 유일한 근대 철학자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8)와 『스피노자: 실천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에서 스피노자를 서양 철학의 "지하 수맥"으로 읽어낸 것은, 바로 이 비(非)이원론적 존재론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둘째, 생태 위기의 시대에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설 철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은 인간과 자연의 위계를 해체한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자연의 한 양태다. 이 통찰은 지금의 기후 담론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세계관의 전환에 해당한다. 환경운동이 "자연을 보호하자"는 슬로건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존재론적 인식으로 나아갈 때, 스피노자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자원이 된다.
셋째, 감정의 시대에 감정을 이해하는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보보다 감정이 여론을 지배하고, 분노와 공포가 정치적 동력이 되며, 감정 노동이 산업의 핵심이 된 시대 — 이 시대에 감정을 단순히 "관리"하라는 조언은 부족하다. 스피노자의 감정 이론은 감정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수동적 감정을 능동적 감정으로 전환하는 길을 제시한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제국』(Empire, 2000)과 『다중』(Multitude, 2004)에서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 개념을 현대 정치이론의 핵심으로 재해석한 것도 이 맥락이다.
넷째, 알고리즘이 욕망을 설계하는 시대에 자유의 의미를 다시 묻기 위해서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원인 없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는 원인에 대한 명석한 인식이다. 빅데이터와 추천 알고리즘이 우리의 소비, 관계, 심지어 정치적 태도까지 설계하는 현실에서, 스피노자적 자유론은 "진짜 내 선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가장 근본적인 틀이 된다.
6. 스피노자를 읽을 때 주의할 것
스피노자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에티카』의 형식이다. 기하학적 방식으로 쓰인 이 텍스트는 정의(定義), 공리, 정리, 증명, 주석의 연쇄로 구성되어 있어, 문학적 스타일의 니체나 화려한 변증법의 헤겔에 비해 건조하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형식 자체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을 반영한다. 스피노자는 감정과 욕망을 수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읽기 어렵다면, 그것은 스피노자가 쉬운 답 대신 정확한 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스피노자를 단순한 범신론자(汎神論者)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다. "신 즉 자연"이라는 명제를 "자연 속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뉴에이지적 영성으로 읽는 것은 스피노자의 엄밀한 존재론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원인이자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다. 감동을 주기 위해 쓰인 문장이 아니라, 정밀하게 정의된 개념이다.
입문 독서로는 스티븐 내들러(Steven Nadler)의 전기 『스피노자: 한 철학자의 삶』(Spinoza: A Life, 1999)이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좋다. 본격적인 해설서로는 들뢰즈의 입문서 『스피노자: 실천철학』이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이다. 한국어 자료로는 진태원의 스피노자 연구서들과 『에티카』 한국어 번역본(강영계 역, 서광사)이 참조할 만하다. 다만 『에티카』 자체보다는 해설서를 먼저 읽고 본문에 진입하는 것을 권한다.
스피노자 이후의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위로를 주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 —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다, 나는 자유롭게 선택한다 — 을 해체하는 철학자다. 그 해체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이 전제들 위에 삶을 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전제들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 — 기후가 무너지고, 알고리즘이 욕망을 설계하며, 몸과 마음의 경계가 과학적으로 허물어지는 지금 — 스피노자의 철학은 무너진 기반 위에 다시 서기 위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새로운 지도가 된다.
[주요 참고 문헌]
스피노자 주요 저작: 『에티카』(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 『지성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1677). 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8). Gilles Deleuze,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Antonio Damasio, Looking for Spinoza: Joy, Sorrow, and the Feeling Brain (Harcourt, 2003). Steven Nadler, Spinoza: A Life (Cambridge UP, 1999).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Empire (Harvard UP, 2000). 강영계 역, 『에티카』(서광사). 진태원, 스피노자 관련 연구서 및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