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무엇인가?" 이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을까.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평생 이 하나의 질문을 붙들고 살았다. 그러나 이 질문은 대학 강의실 안에만 갇혀 있던 적이 없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가다머의 해석학, 데리다의 해체론,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사상 지형 전체를 관통하며 흘러갔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며 하이데거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다. 기술철학에서, AI 윤리 담론에서, 심지어 건축과 도시설계의 현장에서까지. 왜 하필 하이데거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하이데거가 무엇을 주장했는가보다 하이데거가 어떤 물음의 방식을 열어놓았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살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 — "존재(Sein)" — 에 대한 끈질긴 되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되물음이 겨냥하는 맹점이, 알고리즘과 효율성이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1. "존재 망각" —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은 서양 철학 2,500년의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망각의 역사로 진단한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은 "존재자(Seiendes)" — 즉 눈앞에 있는 사물, 대상, 실체 — 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탐구해 왔으면서, 정작 "존재 자체(Sein)"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이라 불렀다.
이것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일상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이 기기의 스펙, 가격, 최신 앱에 대해서는 상세히 안다. 그러나 "이 기기와 함께하는 나의 존재 방식은 어떤 것인가?"라고 물어본 적은 거의 없다. 잠들기 전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스크롤하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은 바로 이런 맹점을 가리킨다. 대상에 대한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그 대상과 관계 맺고 있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은 완전히 빠져 있는 상태 말이다.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를 "눈앞에 놓인 것(Vorhandenheit)" —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대상 — 으로 환원해 온 역사가 결국 오늘날의 데이터 중심 세계관으로 귀결되었다는 하이데거의 진단은, 빅데이터와 AI가 인간의 행동까지 예측 가능한 변수로 처리하는 시대에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해 보인다.
2. "현존재" —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가 "현존재(Dasein)"다. 왜 굳이 '인간'이라 하지 않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특정한 존재 이해 — 이성적 동물, 사회적 존재, 생물학적 유기체 등 — 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 전제를 일단 괄호에 넣고,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현존재의 핵심 특성은 자기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문제(Frage)"가 된다는 것이다. 돌멩이는 자기가 돌멩이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이미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과정 그 자체다.
이 통찰이 왜 지금 중요한가? 오늘날 우리는 인간을 점점 더 데이터 포인트로 환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클릭, 체류 시간, 구매 이력을 분석하여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규정한다. 넷플릭스가 추천해주는 영화 목록, 쇼핑몰이 보여주는 맞춤 광고, AI가 생성하는 성격 프로파일 — 이 모든 것이 인간을 측정 가능한 패턴으로 치환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이러한 환원에 대한 근본적 저항이다. 인간은 데이터로 포착될 수 없는 존재, 즉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음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3. "세인(das Man)" — 누가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개념 중 일상에서 가장 체감하기 쉬운 것이 "세인(das Man)"이다. 직역하면 "그들" 또는 "사람들" 정도가 되는 이 개념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특정한 누구도 아닌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요즘은 이런 게 대세야", "다들 그렇게 하더라", "그 정도는 해야지" — 이런 말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다.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인 익명의 주체, 그것이 세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세인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세인이 읽는 것을 읽고, 세인이 분노하는 것에 분노하며, 세인이 즐기는 것을 즐긴다(『존재와 시간』 제27절).
이것은 단순한 동조 압력의 문제가 아니다. 세인은 현존재의 존재 방식 자체를 장악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이라 불렀다. 비본래적 존재란 "나쁜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떠맡지 않고 '그들'에게 넘겨버린 상태를 뜻한다.
SNS 시대에 이 분석은 거의 예언적이다. 트위터(현 X)의 트렌딩 토픽, 인스타그램의 추천 피드, 틱톡의 알고리즘 —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거대한 세인의 공론장이다. "오늘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무엇이 재미있는가" —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닌 익명의 '그들'에 의해 설정된다. 하이데거가 1920년대에 "수다(Gerede)", "호기심(Neugier)", "애매함(Zweideutigkeit)"이라 부른 세인의 세 가지 양태는, 마치 오늘날의 정보 과잉, 클릭베이트, 여론의 급변을 예견한 것처럼 읽힌다.
4. 불안과 죽음 — 가장 나다운 순간은 언제인가
그렇다면 세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언제 오는가? 하이데거의 대답은 다소 역설적이다. 그것은 "불안(Angst)"의 순간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은 일상적 공포와 다르다. 공포는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다 — 시험, 해고, 사고 등. 그러나 불안은 특정 대상이 없다. 갑자기 모든 일상적 의미가 무화되고, 세상이 낯설어지는 그 기묘한 순간. "왜 나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물음이 밀려오는 경험을 떠올려 보라. 하이데거는 이 불안이야말로 현존재가 세인의 은폐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의 진실과 마주하는 근본 기분(Grundstimmung)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불안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이 있다. 죽음이다.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 개념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사후세계 논의와 무관하다. 핵심은 이것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아무도 나 대신 죽어줄 수 없다. 이 대체 불가능성 앞에서 현존재는 비로소 자기 존재를 "내 것"으로 떠맡게 된다.
병원에서 중대한 진단을 받은 사람이 갑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현상,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후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밀려오는 경험 — 이런 것들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eigentlich)" 존재로의 전환과 맞닿아 있다. 물론 하이데거는 이 전환이 영구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현존재는 본래성과 비본래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5. 기술에 대한 물음 — 하이데거가 가장 절실해지는 지점
하이데거의 사유 중 21세기에 가장 직접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기술에 대한 성찰이다. 후기 하이데거의 핵심 텍스트인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4)에서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이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 즉 존재가 스스로를 보여주는 특정한 양태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근대 기술의 본질을 "몰아세움(Gestell, 닦아세움)"이라 불렀다. 이것은 모든 존재자를 "부품(Bestand)" — 언제든 동원 가능하고, 교체 가능하며, 최적화 가능한 자원 — 으로 전환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강물은 수력발전소의 에너지원이 되고, 숲은 목재 자원이 되며, 땅은 개발 부지가 된다.
이 분석을 2020년대에 적용하면 섬뜩할 정도로 정확한 그림이 그려진다. 플랫폼 경제에서 인간의 관심(attention)은 광고 수익을 위한 자원으로 전환된다. 긱 이코노미에서 노동자의 시간은 실시간으로 호출 가능한 부품이 된다. 생성형 AI의 학습 데이터로 동원되는 인간의 언어, 이미지, 창작물은 계산 가능한 패턴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의 '몰아세움'은 디지털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포착하는 틀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단순한 거부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의 시구를 인용하며,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하는 것도 자란다(Wo aber Gefahr ist, wächst das Rettende auch)"고 했다. 기술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 자체가 기술적 사유에 지배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태도를 "내맡김(Gelassenheit)" — 기술을 사용하되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 — 이라 불렀다(Gelassenheit, 1959).
6. 하이데거가 지금 소환되는 진짜 이유
하이데거가 21세기에 다시 절실해진 이유를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존재 방식 자체를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알고리즘, AI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재편한다. "기술은 중립적 도구일 뿐이다"라는 통념에 가장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가 하이데거다. 기술철학자 앤드루 핀버그(Andrew Feenberg)가 『기술을 다시 생각한다』(Questioning Technology, 1999)에서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현대 기술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도 이 맥락이다.
둘째, '나다움'의 위기가 전례 없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전시하고 브랜딩하는 시대에,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대답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하이데거의 본래성/비본래성 분석은 이 현상을 진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 중 하나다. 한병철이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 2010)에서 현대인의 자기 착취 구조를 분석할 때 하이데거적 문제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셋째, "거주(Wohnen)"와 "장소(Ort)"에 대한 물음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auen Wohnen Denken, 1951)에서 인간의 존재를 "거주"로 파악했다. 단순히 건물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의미 있게 머무는 것이 거주다. 디지털 노마드, 공유 오피스, 메타버스의 시대에 — 우리는 과연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부동산 문제를 넘어 존재론적 차원의 질문이 된다.
7. 하이데거를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문제
하이데거에 접근할 때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의 나치 가담 문제다. 하이데거는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하며 나치에 공식적으로 협력했고,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나치당원 자격을 유지했다. 2014년에 출판된 이른바 『검은 노트(Schwarze Hefte)』는 그의 반유대주의적 사유가 단순한 정치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그의 철학적 사유 자체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문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이 문제 때문에 하이데거의 사유 전체를 폐기해서도 안 된다. 하이데거 자신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판적 "해체(Destruktion)"다. 즉 그의 사유에서 여전히 사유할 만한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분리하는 작업이다. 리처드 울린(Richard Wolin)의 『하이데거의 제자들』(Heidegger's Children, 2001)이나, 피터 트라브니(Peter Trawny)의 『하이데거와 반유대주의의 신화』(Heidegger und der Mythos der jüdischen Weltverschwörung, 2014)는 이 비판적 작업의 중요한 참조점이다. 한나 아렌트, 레비나스, 데리다 같은 사상가들이 하이데거로부터 배우면서도 하이데거를 넘어선 것은, 이러한 비판적 계승의 모범적 사례다.
8. 읽기를 위한 안내
입문 독서로는 『존재와 시간』의 1부, 특히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분석과 "세인" 분석이 담긴 전반부(1편 1장~4장)를 권한다. 후기 하이데거에 관심이 있다면 「기술에 대한 물음」과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 비교적 접근 가능한 텍스트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까치, 1998)이 가장 널리 읽히며, 박찬국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그린비, 2014)이 입문 안내서로 유용하다. 후기 사상에 대해서는 이수정·박찬국 편역 『하이데거의 예술철학』(문예출판사, 2002)도 참고할 만하다.
하이데거의 텍스트는 악명 높을 정도로 난해하다. 그가 기존 철학 용어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독자적인 용어를 만들어 쓴 것은, 기존의 언어가 이미 존재 망각적 사유에 오염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의 당혹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그 당혹감 자체가 하이데거가 의도한 효과 — 자명해 보이는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 — 이기도 하다.
존재를 묻는 일의 의미
하이데거는 답을 주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물음 자체를 바꿔놓은 철학자다. "존재자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도록 만든다. 효율과 최적화가 최고 가치가 된 시대, 인간마저 데이터와 자원으로 환원되는 시대, 기술이 공기처럼 투명해져서 그 지배력이 보이지 않게 된 시대에 —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하이데거의 물음은 거추장스럽지만, 그래서 정확히 필요하다.
[주요 참고 문헌]
하이데거의 주요 저작: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4),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auen Wohnen Denken, 1951), 『내맡김』(Gelassenheit, 1959), 『검은 노트』(Schwarze Hefte, 2014 출간). Walter Kaufmann, Existentialism from Dostoevsky to Sartre (Meridian, 1956). Andrew Feenberg, Questioning Technology (Routledge, 1999). Richard Wolin, Heidegger's Children (Princeton UP, 2001). Peter Trawny, Heidegger und der Mythos der jüdischen Weltverschwörung (Klostermann, 2014). 한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까치, 1998).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그린비, 2014). 이수정·박찬국 편역, 『하이데거의 예술철학』(문예출판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