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살아 있는 동안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라는 좁은 도시 안에서만 알려진 철학자였다. 그는 42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방대한 저작을 남겼지만, 당시 유럽 철학의 주류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거대한 체계 철학이었고, 개인의 실존을 파고든 키에르케고르의 사유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수필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그의 사상을 발굴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재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키에르케고르인가? 2020년대의 한국은 키에르케고르가 살던 19세기 덴마크와 외형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내면의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선택지는 넘쳐나지만 선택의 기준이 사라진 시대, 연결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고독은 더 깊어진 시대, 스스로를 설계하라는 요구는 커졌지만 '나'가 무엇인지는 더욱 불분명해진 시대. 키에르케고르는 이 모순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황을 이미 철학적 문제로 정면에 세웠다.
1. 체계를 거부한 철학자 — 개인의 실존이 우선이다
키에르케고르 철학의 출발점을 이해하려면 그가 왜 헤겔에 맞섰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헤겔의 철학은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이성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이해한다. 개인은 이 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전체의 논리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에 정면으로 반발했다. '체계 속에서 실존하는 인간은 없다.' 그에게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고뇌하고 선택하는 구체적 개인이었다.
이 입장을 그는 『비학문적 후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1846)에서 명확히 표현했다. '주관성이 진리다(Subjectivity is truth).' 이것은 진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그가 말하려 한 것은, 삶의 의미는 객관적 논증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그것에 완전히 참여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만 획득된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커리어 코칭을 받아도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나만이, 그것도 직접 뛰어들어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 실존의 세 단계 —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유명한 개념 틀 중 하나는 실존의 세 단계 이론이다. 그는 인간이 삶을 대하는 방식을 크게 심미적(aesthetic) 단계, 윤리적(ethical) 단계, 종교적(religious) 단계로 구분했다. 이 세 단계는 단순히 위계적 발전 단계가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논리와 위기를 가지는 실존 양식이다.
심미적 단계는 감각적 쾌락과 흥미, 순간의 강렬함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삶의 방식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1843) 1부에 등장하는 '유혹자의 일기' 속 인물 요하네스가 그 전형이다. 그는 권태를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추구한다. 이 단계의 근본적 위기는 바로 권태(Kedsomhed)다. 자극이 반복되면 무뎌지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지만 결국 공허함이 남는다.
지금 한국의 소비 문화와 콘텐츠 소비 패턴을 보면 이 심미적 단계의 논리가 낯설지 않다. 알고리즘이 끊임없이 다음 영상, 다음 게시물을 추천하고, 우리는 더 자극적인 것을 향해 스크롤을 내린다. 그러나 한 시간 뒤 남는 것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반복의 권태'가 디지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 단계는 의무와 원칙, 보편적 규범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단계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2부에 등장하는 판사 빌헬름이 그 대표자다. 그는 직업적 책임을 다하고,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진정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 단계도 최종적 도달점이 아니라고 보았다. 윤리적 삶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실패, 죄성을 직면할 때 내부에서 균열이 생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이 윤리적 단계의 위기다.
종교적 단계는 이 절망을 통과한 이후에 가능한 실존 양식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종교적 단계의 핵심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den Enkelte)로 서는 경험이다. 『공포와 전율』(Frygt og Bæven, 1843)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분석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를 예시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신의 명령에 윤리적 보편 규범(자식을 죽여서는 안 된다)을 넘어서는 '신앙의 도약(Sprung)'을 감행한다. 이것은 비합리성의 찬양이 아니라, 보편적 규범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개인의 절대적 관계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불안 — 자유의 어지러움
키에르케고르의 개념 중 오늘날 가장 자주 소환되는 것은 단연 '불안(Angst)'이다.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4)에서 그는 불안을 공포(Frygt)와 엄밀하게 구별한다. 공포는 구체적 대상이 있다. 뱀이 무서운 것, 취업 면접이 두려운 것은 공포다. 그러나 불안은 대상이 없다. 무언가 불안한데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상태, 그것이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이다.
그는 이 불안을 '자유의 어지러움(Schwindel der Freiheit)'이라고 불렀다.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존재는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매 순간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낀다. 높은 절벽 끝에 서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 그것은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우리를 아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통찰은 지금 세대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 탁월하게 들어맞는다. 한국의 2030 세대가 흔히 토로하는 것은 단순히 취업이 안 되어서, 집값이 올라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근원적 막막함,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선택을 못 하겠다는 역설적 마비 상태가 있다.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가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 2004)에서 현대적 맥락에서 재조명했지만, 그 철학적 뿌리는 이미 키에르케고르에게 있다. 불안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자유로운 존재라는 증거다.
4. 절망 —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
키에르케고르의 후기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 1849)은 제목만 보면 우울한 책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자아론(自我論)의 걸작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Fortvivlelse)이다. 그리고 이 절망은 자아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과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절망'이 그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고유성을 포기하고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후자는 자신의 고집스러운 자아상에 집착하여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 절망의 두 양태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기대, 학벌 서열, SNS 속 비교의 시선 안에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차단하고 '좋은 스펙'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조형하는 것이 첫 번째 절망이다. 반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고정된 자아상으로 변화와 타협을 거부하며 좌절을 반복하는 것이 두 번째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분석은 이 두 가지가 사실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의 어려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의 반대, 즉 건강한 자아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에게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투명하게 열려 있는 상태다.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계발 담론에서 말하는 '최고의 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나,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나를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의 선택을 쌓아가는 것이다.
5. 간접 소통 — 왜 그는 가명으로 썼는가
키에르케고르의 저작 방식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 상당 부분을 가명(pseudonym)으로 출판했다. 빅토르 에레미타(Victor Eremita), 요하네스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안티-클리마쿠스(Anti-Climacus) 등 다양한 저자 페르소나를 창조하여 서로 다른, 때로는 상충하는 관점으로 글을 썼다.
이것은 단순한 익명성 전략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간접 소통(indirekte Meddelelse)'의 방법이라고 불렀다. 그는 직접적으로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실존적 진리를 전달하는 최악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실존적 진리는 강의를 통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갈등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획득된다. 그래서 그는 독자를 다양한 관점과 상황 앞에 세우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택했다.
오늘날의 맥락에서 이 통찰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인플루언서가 '이렇게 살아라'는 메시지를 쏟아내고,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맞춤형 세계관을 설계해주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가? 키에르케고르의 간접 소통 이론은 필터버블(filter bubble)과 에코챔버(echo chamber) 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180년 전에 이미 내장하고 있다.
6. 키에르케고르가 지금 소환되는 진짜 이유
키에르케고르가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성취와 스펙, 외적 지표를 중심으로 자아를 평가해 왔다. 그러나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연봉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공허함과 번아웃을 호소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공허함이 외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문제임을 150년 전에 이미 정확하게 짚었다.
둘째, 불안을 병리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불안을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다룬다. 명상 앱, 수면 보조제, 마인드풀니스 강좌가 넘쳐나는 것은 그 반증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불안은 자유의 증거이자 자아 성장의 동력이다.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발견하는 것 — 이 시각은 증상 억제에 치중하는 웰빙 산업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셋째,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를 찾아라', '나답게 살아라'는 메시지는 지금 자기계발 담론의 핵심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 진정성이 얼마나 달성하기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남들이 인정하는 나다움'으로 진정성을 대체하는지를 섬세하게 분석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자기다움'을 연출하는 행위가 과연 진정한 실존인가 — 키에르케고르라면 이 질문을 피해가지 않을 것이다.
7. 키에르케고르를 읽을 때 주의할 것
키에르케고르에 접근할 때 몇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 그의 저작은 여러 가명 저자를 통해 쓰였기 때문에, 특정 가명 저자의 입장을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최종 입장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이냐 저것이냐』 1부의 심미주의자 A의 말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제 신념이 아니라, 그 단계의 논리가 스스로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서사적 장치다.
둘째,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단계를 문자 그대로의 기독교 신앙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그가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 선다'고 말할 때, 이것은 특정 종교 교리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완전히 책임지는 태도의 은유로도 읽힐 수 있다. 실제로 사르트르나 카뮈(Albert Camus)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도 키에르케고르에게서 핵심적 통찰을 이어받았다.
입문으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별 독해나 『불안의 개념』을 권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아 개념에 집중하면서 읽으면 철학적 심화에 매우 유효하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임규정 번역의 『불안의 개념』(한길사)과 『죽음에 이르는 병』(한길사)이 신뢰할 만하며, 표재명의 『키에르케고르 연구』(지성의샘, 1995)가 전반적인 입문 안내서로 유용하다. 영어권에서는 발터 로우리(Walter Lowrie)와 하워드 홍(Howard V. Hong)의 번역이 표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알라스테어 해나이(Alastair Hannay)의 Kierkegaard: A Biography(Cambridge UP, 2001)가 포괄적 전기로 권장된다.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답을 내놓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독자를 내모는 철학자다. 그의 글 안에는 안전한 처방전이 없다. 있는 것은 질문뿐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서 살고 있는가?', '당신의 불안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당신이 절망하고 있다면, 그 절망은 어떤 종류인가?'
이 질문들은 불편하다. 정답이 없고,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그 불편함 자체가 실존의 시작이다. 거대 서사가 제공하는 레일 위에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발 앞의 다음 한 걸음을 자신이 내딛어야 한다는 것. '나다움'이 콘텐츠가 되어버리고, 진정성이 브랜딩 전략이 된 시대에 — 키에르케고르의 불편한 질문은 그래서 지금 더 필요하다.
[주요 참고 문헌]
키에르케고르 주요 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1843), 『공포와 전율』(Frygt og Bæven, 1843),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4), 『비학문적 후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1846),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 1849).
Alastair Hannay, Kierkegaard: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Lowrie, A Short Life of Kierkegaa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2).
Howard V. Hong & Edna H. Hong (trans. & eds.), The Essential Kierkegaa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임규정 역,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한길사).
표재명, 『키에르케고르 연구』 (지성의샘, 1995).
Barry Schwartz, The Paradox of Choice (HarperCollins, 2004).
Jean-Paul Sartre, L'Être et le Néant (Gallimard, 1943) — 키에르케고르 실존 개념의 계승과 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