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치르고, 49재를 지내고, 1주기를 보냈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그 친구가 생각난다. SNS에서 우연히 그와 비슷한 프로필 사진을 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그만 잊어. 네 인생도 살아야지." 그렇다. 우리는 도대체 누군가를 얼마나 오래 슬퍼해야 하는가? 애도에도 마감 기한이 있는 것일까?
프로이트의 답변: 애도는 끝나야 한다
1917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애도는 정상적인 심리 과정이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끝난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사람은 처음에는 그 대상에 집중했던 모든 심리적 에너지를 조금씩 회수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새로운 대상에게 다시 투자한다. 이것이 건강한 애도다.
프로이트는 이를 '애도 작업'이라고 불렀다. 죽은 이와 관련된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그 기억 속에 묶여 있던 감정을 조금씩 풀어내는 과정이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애도는 끝난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은 이 없는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만약 이 과정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면? 그것은 멜랑콜리아라는 병리적 상태로,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다.
한국 사회는 프로이트의 이 관점을 충실히 따른다. 장례 기간이 지나면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점점 부적절한 것이 된다. "고인도 편히 가시게 이제 그만 울어"라는 말이 반복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쏟아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애도에는 마감이 있고, 그 마감을 넘기면 비정상이라는 무언의 압력이 작동한다.
데리다의 반론: 애도는 끝날 수 없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이 '정상적 애도'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데리다에게 진정한 애도란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이는 절대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고유함, 그 사람만의 특별함은 결코 완전히 이해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이 가진 역설을 지적했다. 만약 내가 애도에 '성공'해서 죽은 이를 내 안에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나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타자로서의 그 사람은 사라지고, 내 기억 속의 이미지만 남는다. 그것은 사실상 망각이다. 반대로 내가 애도에 '실패'해서 죽은 이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면, 그것은 타자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는 이 불가능한 지점에 있다.
데리다 자신도 수많은 동료와 친구들의 죽음을 겪으며 이런 애도의 글들을 남겼다. 롤랑 바르트, 폴 드 만,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는 이들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비록 대답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죽은 이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이것이 데리다에게 애도였다.
우리 시대의 애도 - 빨리 잊으라는 강요
현대 사회는 효율성을 중시한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기간 동안 적절한 방식으로 슬퍼하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SNS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게시물이 올라오지만, 그것도 며칠이 지나면 뉴스피드에서 사라진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콘텐츠가 필요하다. 슬픔은 계속 소비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극복'과 '치유'를 강조한다. 상담센터에서는 애도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그 목표는 대부분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다.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애도는 끝내야 할 과제다. 회사는 몇 일의 애도 휴가를 주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회복되지 않았어도 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실은 평생을 가기도 한다. 부모를 잃은 아이, 자식을 잃은 부모, 짝을 잃은 배우자... 이들에게 "이제 그만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것은 죽은 이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애도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 누군가는 1년 안에 일상을 회복하고, 누군가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슬퍼한다. 둘 다 정상이다. 중요한 것은 죽은 이와 나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에너지를 회수하는 방식이든, 데리다가 말한 대로 불가능한 대화를 시도하는 방식이든, 그것은 각자가 선택할 문제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무력하다. 애도는 그 무력함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둘러 슬픔을 끝내려 하지 말자.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 그리워하는 것, 때로는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