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그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어떻게 공부했어야 했는지 알게 되고, 연인과 헤어진 후에야 그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헤겔이 남긴 유명한 명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야 날아간다. - 『법철학』"는 바로 이런 인간 지혜의 후행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의 지혜의 여신이고, 부엉이는 그녀의 상징이다. 부엉이가 해가 진 후에야 사냥을 시작하듯, 진정한 지혜와 철학적 성찰은 어떤 시대나 현상이 끝나갈 때, 혹은 이미 끝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헤겔의 핵심적 통찰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 인식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철학은 현실의 뒤를 따라간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현실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뒤따라가며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는 당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성을 앞세워 현실을 개조하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를 설계하려 해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국가』가 좋은 예다. 이 작품은 완벽한 이상국가를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당시 아테네 민주정의 혼란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현실적 위기를 목격한 후에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론』은 산업혁명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그 모순이 드러난 후에야 가능했다. 자본주의가 완전히 성숙하기 전에는 그 구조적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는 이런 헤겔의 통찰을 현대적으로 확인해주는 사례다. 그 전까지 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가져온 번영을 찬양했다.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맹신했고, 규제 완화와 자유무역이 모든 문제의 해답인 듯 여겨졌다. 하지만 위기가 터진 후에야 금융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투기자본의 횡포, 극심한 불평등, 시장의 근본적 불안정성 등이 모두 사후에 분석되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 녘에 날아가는 모습이다.
개인사에서 발견하는 지혜의 후행성
이런 현상은 거대한 역사나 사회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자. 그때는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왜 선생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열심히 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어른들의 조언은 공허한 잔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면서, 경쟁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때의 경험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는다. 기초가 부족해서 발목을 잡히는 순간, 그때서야 학창시절의 공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부모님과의 관계는 더욱 극명한 사례다. 청소년기에는 부모의 간섭과 잔소리가 답답하기만 했다. "늦게 들어오지 마라",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마라", "용돈 관리를 제대로 해라" 같은 말들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스스로 부모가 되거나 나이가 들면서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는 마음,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간절함이 그런 말과 행동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연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진행 중일 때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이나 관계의 패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상대방의 단점도 매력으로 보이고, 문제적 상황도 로맨틱하게 해석하기 쉽다. 하지만 헤어진 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패턴이 반복되었는지가 명확해진다. 감정의 열기가 식고 나서야 객관적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역사적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지혜
헤겔이 이 명제를 제시한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가 있었다. 그는 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정착된 후에야 그 변화의 세계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혼란과 폭력, 정치적 역학관계의 급변 등으로 그 본질적 의미가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봉건제에서 근대 시민사회로의 전환, 개인의 자유와 평등 사상의 실현, 민주주의의 출현 등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인터넷 혁명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스마트폰의 보급이 인간관계와 소통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간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현재 진행형으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전환의 한복판에 서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10년, 20년 후 되돌아볼 때 비로소 명확해질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그 영향을 실시간으로 경험했지만, 그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재택근무의 확산, 디지털 격차의 심화, 국경 통제의 강화, 백신 개발의 가속화 등이 장기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
지혜의 한계와 가능성
그렇다면 이런 지혜의 후행성은 단순히 인간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까? 우리가 항상 뒤늦게 깨닫는 것은 우리의 무능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헤겔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현상이 완전히 전개되어야만 그 전체적 구조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편의 소설을 읽을 때를 생각해보자.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서는 그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등장인물들의 성격, 사건들의 연관관계,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등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에야 완전히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역사나 현실도 그 전개 과정이 마무리되어야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현재의 문제에 대해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일들에 대해서도 과거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만 그 판단이 항상 잠정적이고 수정 가능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현재에 대한 진단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불완전한 정보와 제한된 시각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판단하되,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현대의 기후변화 대응이 좋은 예다. 우리는 아직 기후변화의 모든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데이터와 과학적 모델링을 바탕으로 최선의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면 전략을 수정하면 된다. 완벽한 지식을 기다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 녘에 날아간다는 헤겔의 통찰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성급한 판단보다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줄 아는 것, 현재의 혼란 속에서도 언젠가는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 그리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려는 성찰적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불확실성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되, 새로운 깨달음에 열려 있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