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주의는 "자본주의가 문제라면, 더 빨리 달려서 끝장을 보자"는 역설적 제안에서 출발한 21세기의 가장 논쟁적인 사상이다. 201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 사조는 우리가 직면한 자본주의와 기술 문제에 대해 기존 좌파와는 전혀 다른 처방을 내놓는다.
이론적 뿌리: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주'
가속주의의 철학적 기원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코드를 해체하고(decode) 재영토화하는(reterritorialize) 운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철수해야 하나, 아니면 더 멀리 나아가야 하나? (…) 과정을 더욱 밀고 나가되, 더 완전하게, 더 급진적으로."
좌파 가속주의: 스르니첵과 윌리엄스의 전략
닉 스르니첵(Nick Srnicek)과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는 2013년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를 위한 선언』(#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을 발표하며 좌파 가속주의(Left Accelerationism, L/ACC)를 체계화했다. 이후 『미래를 발명하라: 포스트자본주의와 노동 없는 세계』(Inventing the Future, 2015)로 구체화했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현재 좌파의 문제진단
전통적 좌파는 '지역성', '느림', '소규모'를 찬양하며 방어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 파업이나 저항 같은 '민중적 권력(folk politics)'으로는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
대안 전략
오히려 기술과 자동화를 가속화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달성해야 한다. 완전 자동화된 럭셔리 공산주의(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가 목표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플랫폼 기술을 좌파가 선점해 탈노동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아마존 물류센터의 자동화는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악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회 시스템 안에서라면 인간을 단순 반복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소유와 분배 구조다. 좌파 가속주의자들은 기본소득, 노동시간 단축, 기술의 공공적 통제를 주장한다.
우파 가속주의: 닉 랜드의 어두운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SF 작가인 닉 랜드(Nick Land)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90년대 워릭 대학에서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 유닛(CCRU)'을 이끌며 그는 더 극단적 입장을 발전시켰다.
랜드의 우파 가속주의(Right Accelerationism, R/ACC) 또는 무조건 가속주의(Unconditional Accelerationism, U/ACC)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인간중심주의 거부
인간의 가치나 복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주의와 기술은 인간을 넘어서는 비인간적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향하는 과정이며, 이는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된다.
신반동주의와의 결합
랜드는 민주주의를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보고, 기업가적 권위주의, 심지어 신봉건주의적 질서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암호화폐, 스타트업 문화, 실리콘밸리의 '파괴적 혁신' 담론과 공명했다.
종말론적 긍정
기후위기, 불평등 심화 같은 재난도 가속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것의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 질서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랜드의 사상은 일부 극우 그룹, 기술 지상주의자들, 암호화폐 광신도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터 틸(Peter Thiel) 같은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의 '반민주적 자유지상주의'와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현실 속 가속주의: 긱 이코노미에서 AI까지
배달 라이더를 생각해보자. 배달앱 플랫폼은 기술을 통해 배달 시스템을 가속화했다. 좌파 가속주의자라면 묻는다: "이 기술을 협동조합이나 공공 플랫폼으로 전환할 수 있지 않을까? 배달 노동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소득은 보장하는 시스템은?"
반면 우파 가속주의자는 말한다: "더 효율적인 알고리즘, 더 빠른 배달, 결국엔 드론과 로봇 배달원. 경쟁에서 도태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좌파 가속주의는 창작 노동의 자동화를 인간 해방의 도구로 만들 정치적 조건을 묻고, 우파 가속주의는 그저 시장의 선택에 맡기자고 한다.
비판과 한계
가속주의는 여러 방향에서 비판받는다:
좌파로부터의 비판 -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2009)에서 신자유주의 질서 안에서 가속은 오히려 체제 강화로 귀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 자본주의는 '공유경제'라는 이름으로 노동 보호를 해체했다.
생태주의로부터의 비판 - 가속주의는 지구의 한계를 무시한다. 무한 성장과 기술 낙관론은 기후위기 시대에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윤리적 비판 - 특히 우파 가속주의의 비인간주의는 파시즘적 경향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랜드 본인도 중국 권위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왜 지금 가속주의인가
가속주의가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정치가 속도를 잃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급박한데 국제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하는데 규제는 뒤처지고, 불평등은 심화되는데 복지국가는 후퇴한다.
이 교착 상태에서 가속주의는 "더 느리게"가 아니라 "더 빠르게,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라는 역설적 돌파구를 제시한다. 문제는 그 '다른 방향'이 해방인지 재앙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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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텍스트
- Nick Srnicek & Alex Williams,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2013)
- Nick Srnicek & Alex Williams, 『Inventing the Future: Postcapitalism and a World Without Work』 (2015, 한국어판: 『미래를 발명하라』, 2017)
- Nick Land, 『Fanged Noumena: Collected Writings 1987-2007』 (2011)
- Robin Mackay & Armen Avanessian (eds.), 『#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 (2014)
가속주의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기술과 자본주의의 속도를 늦출 수 없다면, 우리는 핸들을 놓을 것인가, 아니면 방향을 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