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마법: 디지털 시대가 앗아간 예술의 숨결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세계 어느 박물관의 명화든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루브르에 가지 않아도 모나리자를 보고, 프라도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고야의 그림을 감상한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1930년대에 예견했듯이, 우리는 무언가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바로 예술작품이 지닌 '아우라'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벤야민은 아우라를 독특하면서도 시적인 방식으로 정의했다.
일회적 현상의 독특한 직조, 즉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것의 현현.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이 난해해 보이는 문장은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을 포착한다. 여름날 오후 나무 그늘 아래 누워 구름을 바라보는 순간, 그 구름은 분명 우리 눈앞에 있지만 동시에 무한히 먼 곳에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거리감과 현존이 동시에 느껴지는 경험, 그것이 바로 아우라다.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그 작품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단 하나뿐이며, 그 캔버스가 지닌 물질적 역사와 시간의 흔적은 복제될 수 없다. 작품이 창조된 순간의 빛, 화가의 붓놀림, 물감의 질감, 그리고 그것이 걸어온 역사적 궤적이 모두 아우라를 구성한다.
복제기술이 파괴한 것
사진과 영화의 등장은 예술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기술복제가 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한다는 점이었다. 사진으로 찍힌 순간, 그림은 더 이상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복제본이 동시에 여러 공간에 존재하게 되고, 그 순간 '지금-여기'라는 유일성은 사라진다.
대학로 어느 카페에 걸린 고흐의 「해바라기」 포스터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분명 고흐의 작품을 재현하고 있지만,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원본을 마주했을 때의 전율과는 차원이 다르다. 원본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 작품이 130여 년의 시간을 견뎌온 물질적 존재라는 사실, 고흐의 손이 실제로 닿았던 그 표면이 눈앞에 있다는 경외감, 바로 그것이 아우라다.
일상 속 아우라의 소멸
아우라의 상실은 미술관 밖 우리 일상에서도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SNS에 올라온 여행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장소를 '경험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진 속 에펠탑과 실제로 그 앞에 서서 파리의 공기를 마시며 느끼는 에펠탑은 전혀 다른 것이다. 스트리밍으로 듣는 음악과 콘서트장에서 울리는 라이브 연주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시대는 모든 것을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지닌 고유한 현존의 마법을 희석시켰다.
최근 AI가 생성한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생각해보면, 벤야민의 통찰은 더욱 예리하게 다가온다. 클릭 한 번으로 무한히 생산되는 이미지들은 애초에 원본이 없다. 그것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복제본이며, 따라서 아우라를 가질 수 없다.
아우라의 상실, 그 이후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을 단순히 비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예술을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에서 해방시켜 대중에게 돌려준다고 보았다. 복제기술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술은 종교적·주술적 숭배의 대상에서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이 복제되고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진짜'와 '특별함'을 갈구한다. 한정판 스니커즈에 열광하고, 콘서트 티켓팅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우라를, 그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남긴 질문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을 준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진짜 아우라를 경험한 것은 언제였는가?
© 2025 아트앤스터디 + claude.ai, CC BY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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