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26일 새벽,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작은 마을 포르부. 발터 벤야민은 호텔 방 창가에 앉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피레네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방 안에는 그가 목숨처럼 여기는 원고가 들어있었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그 원고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벤야민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나치의 추격을 피해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다시 이곳까지 온 긴 여정이 그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히는 것은 완성하지 못한 사상에 대한 조급함이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가 떠올랐다. 그 천사는 과거의 폐허를 바라보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벤야민은 그 천사를 역사의 천사라고 불렀다. 천사는 과거의 재앙들을 보며 그것들을 복구하고 싶어하지만, 낙원에서 불어오는 폭풍이 그의 날개에 걸려 그를 미래로 밀어낸다. 그 폭풍을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방 안에 놓인 작은 탁자 위로 몸을 기울여 펜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아홉 번째 테제를 적기 시작했다.
"낙원에서 불어오는 폭풍이 천사의 날개에 걸렸고, 폭풍이 너무 강해서 천사는 더 이상 날개를 접을 수 없다. 이 폭풍이 천사를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으로 거침없이 밀어낸다. 한편 천사 앞의 폐허 더미는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이 폭풍을 우리는 진보라고 부른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베를린의 서점에서 처음 본 책들, 그 책들이 주는 아우라. 책은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응축되어 있었고, 수많은 손길이 스며있었다. 하지만 이제 기계복제의 시대가 도래했다. 원본이 가진 고유한 아우라는 복제 기술 앞에서 사라져갔다.
벤야민은 잠시 펜을 멈추고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저 산맥 너머에는 스페인이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로, 다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아돌프 브레히트와 한나 아렌트가 이미 그 길을 갔다. 하지만 비자는 하루 만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진보란 무엇인가?" 그는 다시 자문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미래 세대를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것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혁명은 미래를 향한 질주가 아니라 과거의 억압받은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메시아적 시간은 선형적 시간과는 다른 차원에 있었다.
펜을 다시 들어 열한 번째 테제를 적었다.
"지배계급과의 단절은 어떤 특정한 정치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과제다. 계급투쟁은 역사가들이 잊고 있는 것, 즉 전통을 파괴하려는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갑자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벤야민은 움찔했다. 하지만 곧 호텔 투숙객의 발소리임을 알고 안도했다. 그는 다시 원고에 집중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올랐다. 마들렌 과자 냄새로 되살아나는 과거의 기억. 벤야민은 그것을 무의지적 기억이라고 불렀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는 단순한 연대기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와 만나는 순간에 번쩍이며 드러나는 것이었다.
"과거는 현재에 의해 인식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는 중얼거렸다. "역사유물론자의 임무는 전통의 구성물을 폭파하는 것이다."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스페인 국경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프랑코 정권은 독일과 협력하고 있었고, 체포될 위험이 컸다. 벤야민은 모르핀이 든 작은 병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마지막 선택지였다.
그는 계속해서 원고를 썼다. 열여덟 번째 테제에서 그는 시간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정리했다.
"'지금시간'은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이다. 개별 상황들의 짧은 요약으로서의 전체 인류 역사의 모델이다."
벤야민은 펜을 내려놓고 깊게 숨을 쉬었다. 그의 철학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진보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고, 역사의 억압받은 자들에게 목소리를 주며,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는 것. 그것이 그가 평생 추구해온 사상의 핵심이었다.
창밖으로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벤야민은 마지막 테제를 적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과 역사유물론을 결합한 그의 독특한 철학이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토라와 기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회상을 가르쳤다. 이것이 그들에게서 미래의 매력을 제거했다. 미래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메시아적 시간의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원고를 완성하고 나서 벤야민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평생에 걸친 사상 여행이 여기서 끝나는 것 같았다. 아우라의 쇠락, 역사의 천사, 메시아적 시간, 변증법적 이미지. 이 모든 개념들이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원고가 세상에 나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나치의 추격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벤야민은 원고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창밖의 피레네 산맥을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저 산맥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이 순간, 메시아적 시간이 번쩍이는 이 순간.
그는 모르핀 병을 다시 손에 들었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이미 완성되었다. 역사의 폭풍 속에서도 억압받은 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던 한 철학자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새벽의 첫 빛이 원고 위에 내려앉았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햇빛에 반짝였다. 벤야민의 마지막 원고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진보라는 폭풍에 맞서서, 과거의 억압받은 자들을 구원하려는 메시아적 꿈을 담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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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발터 벤야민이 1940년 9월 26일 포르부에서 자살하기 전날 밤을 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작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실제로 1940년 봄에 완성되었으며, 친구 한나 아렌트에 의해 보존되어 후에 출간되었다.
벤야민의 핵심 개념들인 아우라, 역사의 천사, 메시아적 시간, 변증법적 이미지 등은 그의 실제 이론을 바탕으로 했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 대한 해석과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에 대한 언급 역시 그의 실제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그의 마지막 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내적 독백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벤야민의 비극적 죽음은 20세기 지성사의 큰 손실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