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0월 어느 비 오는 화요일 아침, 장 보드리야르는 낭테르 대학교 사회학과 연구실에서 원고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회색빛 구름이 파리 교외를 덮고 있었고, 실내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그의 손끝에는 반쯤 쓰다 만 글이 있었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현실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책상 한편에는 월트 디즈니월드 팜플렛이 놓여있었다. 지난여름 미국 출장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 화려한 색감과 완벽한 미소들이 지금도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디즈니랜드에서 그는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목격했다고 확신했다. 바로 현실 자체가 시뮬라크르로 대체되는 순간을.
연구실 문이 열리며 동료 교수인 미셸 마페졸리가 들어왔다.
"장, 또 그 이상한 이론에 매달리고 있군."
"이상한 이론이라니." 보드리야르가 담배를 끄며 말했다. "미셸, 자네는 어제 저녁 뉴스를 봤나?"
"물론이지. 미테랑 대통령의 경제정책 발표였지."
"그래, 바로 그거야." 보드리야르의 눈이 빛났다. "자네가 본 건 정말 미테랑이었을까, 아니면 미테랑의 이미지였을까?"
마페졸리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군. 장, 자네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정치인이 TV에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게 바로 문제야." 보드리야르가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인을 보는 게 아니라 정치인의 '이미지'를 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되어버렸어."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드리야르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은 진짜였다. 적어도 아직은.
"자네 말이 맞다면, 우리는 허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건가?" 마페졸리가 물었다.
"허상이 아니야. 그것보다 더 복잡해." 보드리야르가 돌아서며 말했다. "허상은 적어도 진실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시뮬라크르는 다르다. 그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숨길 것 자체가 없기 때문이지."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디즈니랜드 팜플렛을 들어올렸다.
"지난여름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의 일이야. 나는 처음에 그곳이 현실의 왜곡된 복사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어. 디즈니랜드가 가짜인 이유는 미국의 나머지 부분이 진짜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 전체가 이미 디즈니랜드였다."
마페졸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이퍼리얼리티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 보드리야르가 원고지에 펜을 대며 말했다. "텔레비전, 광고, 미디어... 이것들이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대체해버렸어. 그리고 사람들은 그 대체물을 더 선호한다."
"예를 들어?"
보드리야르는 잠시 생각했다. "자네 딸이 몇 살이지?"
"열다섯이야."
"그 아이가 좋아하는 가수는?"
"글쎄, 요즘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 이름이 뭐였지?"
"바로 그거야!" 보드리야르가 손뼉을 쳤다. "자네 딸은 실제 가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라디오와 TV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좋아하는 거지. 그리고 그 가수 자신도 자신의 이미지에 맞춰 살아간다. 어디가 진짜이고 어디가 가짜인가?"
마페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니... 우리 딸이 화장하는 것도 TV 광고에서 본 대로 하더군."
"맞아. 광고는 제품을 팔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광고가 현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광고 속의 삶을 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믿는다."
보드리야르는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마저 의심스러워 보였다. 날씨예보에서 예고한 비였으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페졸리가 물었다.
"모르겠다." 보드리야르가 솔직하게 답했다. "아마도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몰라. 시뮬라크르는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는 원고지에 펜을 대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시뮬라크르의 네 단계'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첫째, 시뮬라크르는 깊은 현실을 가린다.
둘째, 시뮬라크르는 깊은 현실의 부재를 가린다.
셋째, 시뮬라크르는 현실의 부재를 감춘다.
넷째, 시뮬라크르는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
"우리는 지금 네 번째 단계에 있다." 그가 중얼거렸다.
마페졸리가 원고지를 들여다보았다. "이해하기 어렵군."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보드리야르가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도를 생각해봐. 옛날에는 지도가 영토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제는 지도가 영토를 만든다. GPS, 위성사진, 가상현실... 우리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는 게 아니라 지도를 통해 경험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젊은이들은 길을 물어보지도 않더군. 모두 지도만 보고 다니던데."
"바로 그거야. 그들에게는 지도가 현실이고, 현실이 지도야. 경계가 사라진 거지."
오후 시간이 흘러가면서 연구실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보드리야르는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소비사회, 미디어, 광고의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길을 잃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장,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마페졸리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말하는 하이퍼리얼리티에서는 진실이나 거짓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건가?"
"정확해." 보드리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무너졌어. 중요한 건 무엇이 더 매력적이고, 더 소비하기 좋고, 더 효과적인가 하는 것뿐이야."
그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예를 들어, 뉴스를 봐. 사람들은 정보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극을 원한다. 그래서 뉴스는 점점 더 자극적이 되고, 스펙터클이 된다.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시청률이 중요하지."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쇼라는 건가?"
"쇼라기보다는..." 보드리야르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내파(implosion)라고 할까.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구분이 사라지는 현상이야. 진짜와 가짜, 원본과 복사본, 주체와 객체, 현실과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뒤섞여버렸어."
창밖에서는 비가 그쳤고, 저녁노을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이것조차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이미 선택권을 잃었다는 거야.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바깥이 없어. 모든 것이 이미 그 안에 있으니까."
마페졸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그럼 희망은 없는 건가?"
보드리야르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밝은 표정이었다.
"희망이라...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뿐일 거야. 의사가 병을 고치려면 먼저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하잖아. 나는 현대 사회의 증상을 분석하는 의사 같은 존재일 뿐이야."
그는 원고지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내일은 미디어와 정치에 대해 써봐야겠어. 리서를 어떻게 분석할지도 생각해봐야 하고."
마페졸리가 떠난 후, 보드리야르는 혼자 남아 창밖을 바라봤다. 파리의 네온사인들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불빛들은 무언가를 광고하고 있었다. 상품, 서비스, 라이프스타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시뮬라크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마지막 문장을 썼다.
"이제 지도가 영토에 앞서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에 앞선다. 우리는 사막의 현실 속에서 시뮬라크르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고 있다."
펜을 내려놓고 나서, 그는 깊은 숨을 쉬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이 이해할까? 아니면 또 하나의 시뮬라크르가 되어버릴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연구실을 나서며 복도의 형광등을 바라봤다. 그 차가운 빛 속에서도 그는 현실과 시뮬라크르의 경계선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경계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은 1981년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을 집필하던 시기를 바탕으로 했다. 보드리야르가 파리 낭테르 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한 것과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미디어 사회에 대한 분석에 몰두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디즈니랜드에 대한 그의 분석과 시뮬라크르 개념, 하이퍼리얼리티 이론은 실제 그의 저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내용들이다. 다만 동료 교수와의 구체적 대화와 그의 사유 과정에 대한 묘사는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보드리야르의 핵심 이론들(시뮬라크르의 4단계, 내파 개념, 하이퍼리얼리티 등)은 그의 실제 학술적 성과를 소설 속에서 쉽게 풀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