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월의 파리는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에는 폐허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듯 카페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었고, 11번가의 작은 아파트에서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원고지 앞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그녀는 방금 써 내려간 이 한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펜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문장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을 뒤흔들어놓을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창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파트 건너편에서는 한 어머니가 딸에게 인형을 안겨주며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시몬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시몬, 여자아이는 조용히 해야 해. 남자아이들처럼 뛰어다니면 안 돼."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여덟 살 시몬은 그때 왜 자신이 동생 엘렌과 달리 책상에 앉아 바느질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나이의 사촌 형 피에르는 마당에서 축구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여성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야." 대학 시절 철학 교수였던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이 떠올랐다. "모성은 여성의 숙명이지."
시몬은 당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 자신이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만들어진" 여성성의 전형이었다. 생물학적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둔갑시키는 교묘한 함정.
문득 사르트르와 함께 보낸 지난 20년이 스쳐 지나갔다. 1929년 소르본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장-폴은 그녀를 한 명의 철학자로 대했다.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지적 파트너로.
"자유는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명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다면 여성도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되든, 직업을 갖든, 혹은 둘 다든. 하지만 현실에서 여성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시몬은 펜을 다시 들었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정의된다. 그는 절대적 존재이고 여성은 상대적 존재에 불과하다. 여성은 본질적인 타자인 것이다."
타자.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중요하게 다룬 개념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게 되는 존재론적 구조.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달랐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타자로 규정되었다.
밤이 깊어갔다. 시몬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하나씩 해부해나갔다.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여자가 뭘 그렇게 많이 배워?"라고 했던 말. 스물다섯 살에 철학교사 자격을 땄을 때도 "남편감을 찾기 위해서겠지"라고 수군거렸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그녀를 "사르트르의 여자친구"로만 소개하는 언론들.
시몬은 창가로 걸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파리의 밤거리에는 몇몇 여성들이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겠지만, 사회는 그들을 '제대로 된' 여성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상황." 시몬은 중얼거렸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상황은 어떤가? 남성보다 훨씬 더 제약적인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 아닌가?
그녀는 다시 원고지로 돌아갔다.
"남성은 여성을 절대적 타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한다. 여성은 남성이 아닌 존재, 즉 결핍된 존재로 정의된다."
문득 작년 봄 카페 드 플로르에서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젊은 여성 철학도가 실존주의에 대해 질문했는데, 주변 남성들은 그녀의 질문 자체보다는 그녀의 외모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예쁜 여자가 철학을 논하니 재미있네"라는 식으로.
시몬은 그때 분노했다. 동시에 자신도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자신 역시 무의식적으로 "여성답게" 행동하려 노력해왔던 것이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시몬은 펜을 놓았다. 오늘 써내려간 원고를 다시 읽어보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경제적 독립, 모성, 사랑, 결혼... 분석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작은 했다. 여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분석을. 그리고 그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가 될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창밖에서는 이른 새벽 노동자들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성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도 언젠가는 이 책을 읽게 될까? 그리고 자신들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볼까?
시몬은 미소를 지었다. 변화는 언제나 개인의 각성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이다.
그녀는 새로운 원고지를 꺼내 들었다.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여성의 역사, 신화, 문학 속에서의 여성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구체적인 여성의 삶.
"존재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다면 여성도 행동해야 했다. 주어진 역할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야 했다.
시몬은 담배를 끄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파리의 새벽은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고, 한 여성 철학자의 펜 끝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장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3월의 찬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아침이었지만, 시몬의 가슴에는 따뜻한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상황을 다시 볼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를 찾아나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철학의 역할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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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9년 『제2의 성』을 집필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보부아르가 생제르맹 데 프레에 거주했던 것과 사르트르와의 관계, 그리고 『제2의 성』의 핵심 명제인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보부아르의 구체적인 집필 과정과 내적 독백,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는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들(자유, 상황, 타자성)을 젠더 문제에 적용한 보부아르의 철학적 성취는 실제 그녀의 학술적 업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