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0월, 흑림의 토트나우베르크 오두막. 마르틴 하이데거는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새벽 빛을 바라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서른여덟의 나이에도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끝없는 질문들로 가득했다. 『존재와 시간』의 원고가 책상 위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고, 어젯밤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존재하는 그러한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뭔가 부족했다. 후설 교수의 현상학적 방법론은 분명 혁신적이었지만, 의식의 지향성에만 매달려서는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존재 그 자체 말이다.
오두막 한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난주부터 느슨해진 서까래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미뤄뒀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망치와 못을 챙겨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망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는 멈칫했다. 손 안의 망치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졌다. 망치는 그냥 '망치'가 아니라 '못을 박는 도구'였고, '서까래를 고치는 수단'이었으며, '오두막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세계 안에서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아, 그렇구나."
하이데거는 망치를 내려놓고 작은 노트를 꺼냈다. 손가락이 차가운 공기에 시려왔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우리는 존재자들을 항상 이미 어떤 맥락 안에서, 어떤 세계 안에서 만난다. 망치는 단순히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손 안에서 쓰임'이다. 데카르트의 연장된 실체나 후설의 의식적 대상이 아니라, 나의 현존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다."
그는 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도 망치처럼 단순히 '있는' 존재자일까? 아니면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방식을 갖고 있을까?
바로 그때, 바람에 날린 나뭇잎 하나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하이데거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죽을 수 있는 존재'로서 이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망치는 부서질 수 있지만 자신의 부서짐을 아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 앎 때문에 불안해한다.
"현존재는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는 존재다."
하이데거는 다시 펜을 들었다.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불안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인 죽음과 마주할 때 경험하는 근본적 기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시간성이다."
하이데거는 중얼거렸다. 현존재의 존재 구조는 시간적이다. 과거로부터 던져져서(Geworfenheit) 현재에 존재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투사한다(Entwurf). 망치가 공간 안에 단순히 현존하는 것과 달리, 인간은 시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펼쳐나간다.
오두막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이데거는 고개를 들어 보니 제자 중 한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후설 교수님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젊은 철학도는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 요즘 강의에서 말씀하시는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존재자와 존재가 어떻게 다른 건가요?"
하이데거는 망치를 보였다. "이 망치를 보게. 자네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망치요."
"그래, 자네는 망치라는 존재자를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망치가 '있다'는 것, 즉 이 망치의 존재는 보이는가?"
제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인지..."
"바로 그것이다." 하이데거는 웃었다. "우리는 존재자들은 잘 보지만 존재 그 자체는 보지 못한다. 망치, 나무, 돌, 인간... 이 모든 것들은 존재자다. 하지만 이들이 '있다'는 것 자체, 즉 존재는 감춰져 있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이 존재를 망각해왔다."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존재를 사유할 수 있을까요?"
"현존재를 통해서다." 하이데거는 답했다. "인간은 존재에 대해 묻는 유일한 존재자다. 망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묻는다. '왜 무가 아니라 존재자가 있는가?' 바로 이 물음을 통해 우리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다."
저녁이 되었다. 제자가 돌아간 후, 하이데거는 다시 원고 앞에 앉았다. 후설의 편지는 아직 뜯어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현상학의 본래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우려를 표현한 내용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밝았다. 오늘 망치를 들면서 깨달은 것들이 『존재와 시간』의 핵심 구조를 이룰 것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 도구적 존재와 현존재의 차이, 시간성의 근본 구조, 존재론적 차이...
그는 펜을 들어 썼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항상 이미 타자들과 함께 존재한다. 현존재는 자신을 둘러싼 의미의 연관체계 안에서 존재자들을 만나며, 이 만남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실존적 관여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 앞에서 불안해하며, 바로 이 불안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자각한다."
밤이 깊어갔다. 하이데거는 오늘 하루 동안 자신 안에서 일어난 사유의 전환을 느낄 수 있었다. 후설의 현상학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묻는 새로운 철학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였고,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현존재의 문제였다.
하이데거는 마지막 문장을 썼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일은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재만이 존재를 이해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미소지었다. 내일부터 이 사유들을 체계적으로 전개해나가야 했다. 『존재와 시간』은 서양 철학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창밖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하이데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부엉이도, 바람도, 나무도 모두 자신들만의 존재 방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물음 속에서 존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토트나우베르크의 밤은 깊어갔지만,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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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하이데거가 1927년 『존재와 시간』을 완성하던 시기의 토트나우베르크 오두막에서의 사색 과정을 바탕으로 했다. 하이데거가 실제로 흑림의 오두막에서 사유하며 집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후설의 현상학을 넘어서려 한 그의 철학적 전환도 실제 과정이다.
다만 망치를 들면서 도구존재와 현존재의 차이를 깨닫는 구체적 상황과 제자와의 대화는 소설적 상상력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핵심 개념들인 현존재(Dasein),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존재론적 차이, 시간성 등은 실제 그의 철학적 성과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