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3년 12월 6일, 나폴리의 산 도메니코 수도원. 이른 새벽 미사를 마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촛불이 흔들리며 책상 위의 양피지들을 희미하게 비췄다. 『신학대전』의 마지막 부분, 그가 평생을 바쳐 완성하려던 대작이 그 앞에 놓여 있었다.
토마스는 깃털 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멈췄다.
지난 20년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키려 노력해왔다.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하나님은 이성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섯 가지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입증했고, 인간의 이성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형제님."
문 밖에서 레지날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충실한 비서이자 제자였다.
"들어오게."
레지날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토마스의 얼굴을 보자 그는 깜짝 놀랐다. 스승의 얼굴이 창백했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형제님, 괜찮으십니까?"
토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겨울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 촛불을 흔들었다.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필사할 준비를 해왔습니다. 오늘은 성체성사에 관한 부분을..."
"레지날드."
토마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깊고 무겁고, 어딘가 공허했다.
"더 이상 쓸 수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 쓸 수 없다."
레지날드는 혼란스러웠다. 스승은 매일같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 때로는 세 명의 비서에게 동시에 서로 다른 내용을 구술하기도 했다. 그의 기억력과 사유력은 경이로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저작을 거의 외우고 있었고, 성경의 모든 구절을 정확히 인용할 수 있었다.
"형제님, 혹시 몸이 편찮으신가요?"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몸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레지날드,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들이... 마치 짚더미 같다."
"형제님!"
레지날드가 놀라 외쳤다. 스승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최고의 신학자였다. 파리 대학에서 가르쳤고, 교황청의 자문을 받았으며,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의 『신학대전』은 기독교 신학의 금자탑이 될 작품이었다.
"형제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형제님의 글들은..."
"짚더미다."
토마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확신? 절망? 아니면 깨달음?
레지날드는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제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형제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토마스는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수도원 정원에는 겨울 장미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화려하게 피어있던 꽃들이 이제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레지날드, 내가 평생 무엇을 해왔는가?"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시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설명하려 했다. 논리로, 이성으로, 말로..."
토마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안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들이 그분 앞에서는 짚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형제님의 다섯 가지 신존재 증명은 완벽합니다. 운동의 논증, 작용인의 논증, 가능성과 필연성의 논증, 완전성의 등급에 관한 논증, 목적론적 논증...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논리적인지..."
토마스가 고개를 저었다.
"레지날드, 나는 착각했다. 하나님을 안다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침묵했다. 창밖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어젯밤 미사를 드리는데..."
토마스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성체를 들어올리는 순간, 갑자기... 갑자기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내가 평생 말과 논리로 설명하려 했던 그분이,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신비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레지날드는 당황했다. 스승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던 토마스가 마치 아이처럼 무력해 보였다.
"형제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형제님께서 더 깊은 신비를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작업들은 무엇인가?"
토마스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신학대전』의 원고들이 두껍게 쌓여있었다. 제1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제2부에서는 인간의 행복과 덕을, 제3부에서는 그리스도와 성사들을 다뤘다. 방대하고 체계적인 신학 백과사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입니다! 형제님의 저작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파리의 학생들이,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심지어 세속 성직자들까지..."
"하지만 레지날드, 나는 지금 깨달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정교한 논증도, 아무리 완벽한 체계도 그분의 신비 앞에서는 한없이 작다는 것을."
토마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을까? 그분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의 대상인데..."
레지날드는 스승의 손을 잡았다.
"형제님, 그렇다고 해서 형제님의 작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형제님께서는 이성과 신앙이 조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이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철학이 신학의 시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토마스가 일어나 서가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 그가 평생 연구하고 주석을 달았던 책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자 한다'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인간의 이성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 진리의 정점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형이상학』을 꺼내 펼쳤다. 자신이 직접 쓴 주석들이 여백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분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레지날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형제님께서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학대전』도 미완으로 남겨두시겠습니까?"
"그렇다."
"하지만 형제님! 제3부의 성사론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겨울 햇살이 시든 장미 가지들을 비추자, 그것들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레지날드, 내가 평생 글로 전하려 했던 것을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겠다."
"다른 방식이라고 하시면?"
"침묵으로."
레지날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은 설교가였고 교사였다. 말과 글로 진리를 전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다.
"형제님, 사람들은 형제님의 가르침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말했다. 이제는 들어야 할 때다."
토마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레지날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무릎을 꿇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당신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은 설명되거나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만나지는 분이라는 것을..."
토마스의 기도 소리가 서재에 울려퍼졌다. 레지날드는 스승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기도를 마친 후, 토마스가 일어났다.
"레지날드, 내가 지금까지 쓴 것들을 정리해두게.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 너머에 더 큰 신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네, 형제님."
"그리고 파리에서 오는 편지들은 모두 정중히 거절하게. 나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겠다."
토마스는 서재를 나갔다. 레지날드는 홀로 남아 스승의 원고들을 바라봤다. 방대한 분량의 『신학대전』, 『진리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들... 이 모든 것들이 스승에게는 이제 '짚더미'일까?
며칠 후, 토마스는 리옹 공의회 참석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1274년 3월 7일,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논증도, 증명도, 체계적 신학도 아닌, 단순한 신앙 고백이었다.
레지날드는 스승의 유고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학문적 성취를 부정했을까? 아니면 그것들을 뛰어넘는 더 깊은 차원을 발견했을까?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지만, 동시에 그분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것이기도 하다. 토마스는 그 역설을 마지막에 온몸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신학대전』은 미완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미완성이야말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장 깊은 가르침이 되었다. 신학은 완성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계 안에 갇힐 수 없기 때문이다.
몇 세기 후,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천사적 박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의 『신학대전』을 기독교 신학의 최고 걸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정작 토마스 자신은 마지막에 그 모든 것을 '짚더미'라고 했다.
그 '짚더미' 선언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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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1273년 12월 6일 나폴리에서 미사를 드린 후 갑작스럽게 저술을 중단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실제로 그는 그날 이후 『신학대전』 집필을 중단했으며, "내가 쓴 모든 것이 짚더미 같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와 비서 레지날드의 관계,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종합 시도, 다섯 가지 신존재 증명 등은 모두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다만 1273년 12월 6일 이후 토마스의 구체적인 내적 경험과 레지날드와의 대화는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요 저작들(『신학대전』, 『진리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과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실제 그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했다. 그가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든 학문적 성취를 상대화했다는 점은 중세 스콜라 철학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