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베네치아. 좁은 운하를 따라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16세기에 만들어진 유대인 게토에 도달한다. '게토(ghetto)'라는 단어가 바로 이곳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은 베네치아 건축대학(IUAV) 교수로 재직하며 이 도시의 역사적 공간들을 자주 거닐었다. 그에게 게토는 단순한 역사적 유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정치의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1995) 시리즈는 이탈리아 현대 철학의 정점에 서 있는 작업이다. 네그리가 다중의 저항 가능성에 주목했다면, 아감벤은 주권 권력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의 근본적 구조를 파헤쳤다. 그의 질문은 명확했다. 어떻게 20세기 유럽 한복판에서 아우슈비츠가 가능했는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 과거의 일인가?
호모 사케르: 죽일 수 있지만 희생시킬 수 없는 생명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고대 로마법의 기묘한 개념이다. 이것은 신성한 것도, 세속적인 것도 아닌 애매한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사케르로 선언된 자는 누구나 죽일 수 있지만, 종교적 의식으로 희생시킬 수는 없다. 즉, 그는 법의 보호 밖에 있으면서도 법에 의해 규정된 존재다.
아감벤은 이 고대의 법적 형상이 현대 정치의 숨겨진 토대라고 주장한다. 현대 국가는 겉으로는 모든 시민에게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든 특정 존재를 법의 보호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피구금자, 난민 수용소의 무국적자들—이들은 모두 현대판 호모 사케르다.
예를 들어보자.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적성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범주를 만들었다. 이들은 전쟁 포로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다.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일반 형사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채 법적 지위 없이 무기한 구금된다. 이들은 법의 안과 밖 경계선에 놓인 존재다. 바로 호모 사케르의 현대적 화신이다.
예외상태: 주권의 진짜 얼굴
아감벤의 분석은 여기서 더 깊어진다. 그는 칼 슈미트의 유명한 명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슈미트, 『정치신학』, 1922). 주권 권력의 본질은 정상적인 법 집행에 있지 않다. 오히려 법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 즉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역사적 사례를 보자. 1933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48조를 이용해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이 명령은 형식적으로는 헌법 조항에 근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헌법 자체를 무력화했다. 예외상태는 일시적 비상조치로 선포되었지만, 나치 체제 내내 지속되었다. 예외가 규칙이 된 것이다.
아감벤이 경고하는 것은 이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도 테러, 전염병, 난민 위기 등을 명목으로 예외상태를 점점 더 자주, 더 길게 선포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정부는 감염병예방법에 근거해 이동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을 광범위하게 제한했다. 물론 공중보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하지만 아감벤의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예외상태에서는 평소라면 위헌으로 간주될 조치들이 '긴급 필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생명정치: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거나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 개념을 더욱 급진화한다. 푸코는 근대 권력이 "죽게 내버려두고 살게 만드는" 권력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변화했다고 분석했다(푸코, 『성의 역사 1권』, 1976). 주권 권력은 더 이상 신하를 죽일 권리만을 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구의 생명, 건강, 출산율, 수명을 관리하고 최적화하려 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는 생명정치가 단순히 생명을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생명을 정치적으로 자격 있는 것과 자격 없는 것으로 분할하는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벌거벗은 생명(bare life)'과 '정치적 삶(bios)'의 구분으로 설명한다.
벌거벗은 생명이란 모든 정치적·사회적·법적 지위가 박탈된 순수 생물학적 생명이다. 아우슈비츠의 '무젤만(Muselmann)'—극도의 영양실조와 탈진 상태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수용자들—은 벌거벗은 생명의 극단적 형상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오늘날을 보자. 지중해를 건너다 익사하는 난민들, 법적 신분 없이 도시 외곽에서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재난 상황에서 트리아지(triage) 원칙에 따라 치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환자들—이들은 벌거벗은 생명의 현대적 얼굴들이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정치적·법적 주체로서의 지위는 불안정하거나 부재한다.
수용소: 현대의 숨겨진 패러다임
아감벤의 가장 도발적인 주장은 이것이다. 나치 수용소는 일탈이나 예외가 아니라, 현대 정치의 숨겨진 패러다임이다. 수용소는 예외상태가 영토화된 공간이다. 거기서는 정상적인 법이 정지되고, 주권 권력이 생명에 대해 무제한적 권한을 행사한다.
베네치아의 게토로 돌아가보자. 게토는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대인들을 도시 안에 거주하게 하되, 특정 구역에 격리한 공간이다. 밤에는 출입문이 잠기고, 기독교 축제일에는 외출이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베네치아 안에 있으면서도 베네치아 밖에 있었다. 포함과 배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이 역설적 구조를 아감벤은 '배제적 포함(inclusive exclusion)'이라 부른다.
이 구조는 현대 난민 수용소에서도 반복된다. 난민촌은 형식적으로는 인도주의적 보호 공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난민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시민사회 밖에 있다. 한국의 화성 외국인보호소, 유럽의 난민 수용 센터, 호주의 역외 난민 수용시설—이들은 모두 현대판 게토다.
네그리와의 차이: 저항 가능성에 대한 회의
아감벤과 네그리는 둘 다 이탈리아 좌파 지식인이지만, 그들의 입장은 대조적이다. 네그리는 제국 권력에 맞서는 다중의 생성적 힘을 강조한다. 그는 비물질노동, 공통적인 것의 생산, 탈주와 저항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반면 아감벤은 주권 권력의 구조적 폭력성과 그것이 생명을 포획하는 방식에 집중한다.
네그리에게 역사는 열려있고, 변혁의 가능성은 현실적이다. 아감벤에게 역사는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이다. 네그리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현대 정치는 아우슈비츠를 잠재태로 품고 있다"고 경고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아마도 이것은 정치적 기질의 차이이기도 하다. 네그리는 행동가이고 낙관주의자다. 아감벤은 사유가이고 비관주의자다. 하지만 둘 다 현대 자본주의와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메시아적 시간: 가능한 탈출구?
그렇다면 아감벤은 완전한 허무주의자인가? 아니다. 그의 후기 작업은 가능한 출구를 모색한다. 그는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 개념에 주목한다(아감벤, 『남은 시간』, 2000). 메시아적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현재 안에서 과거와 미래를 압축하는 특별한 시간성이다.
이것은 추상적으로 들린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감벤이 제안하는 것은 기존 질서에 의해 규정된 정체성과 기능을 정지시키는 '비작동화(inoperativity)'의 실천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은 노동을 정지시킨다. 이때 인간은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나, 순수한 존재로 머문다. 이런 정지와 공백의 순간에 다른 삶의 형식이 현재화될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마도 우리가 끊임없이 생산하고, 수행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자기계발과 자기착취의 회로를 잠시 멈추는 것. 그 멈춤 속에서 우리 자신과 타자를 도구나 자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생명으로 대면하는 것. 이것이 아감벤이 제안하는 미약하지만 진정한 저항의 형식이다.
베네치아에서 서울까지
2005년 베네치아의 아감벤이 분석한 문제들은 2025년 한국에도 유효하다. 한국 사회는 예외상태의 논리를 자주 경험한다. 북한 위협을 명목으로 한 국가보안법의 광범위한 적용, 재난 상황에서 개인 정보와 이동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개입, 이주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법적·사회적 배제. 이 모든 것은 아감벤이 말한 주권의 예외적 구조와 벌거벗은 생명의 생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난민 정책은 아감벤적 분석의 좋은 사례다. 한국은 난민협약 가입국이지만, 난민 인정률은 극히 낮다. 난민 신청자들은 법적 지위의 공백 상태에서 장기간 대기해야 한다. 이들은 한국 영토 안에 있지만, 한국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은 아니다. 일할 권리, 주거할 권리, 의료 접근성 등이 제한된다. 이들은 포함과 배제의 경계선에 서 있는, 현대 한국의 호모 사케르다.
철학적 유산
아감벤의 작업은 20세기 유럽 철학의 여러 전통을 종합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벤야민의 메시아주의, 푸코의 생명정치, 슈미트의 주권 이론. 그는 이 모든 것을 예리한 정치적 분석으로 재구성했다.
그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정치철학, 법철학, 문화연구, 문학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감벤의 개념들이 활용된다. 특히 '예외상태',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 같은 개념들은 현대 정치를 분석하는 필수 어휘가 되었다.
비판도 있다. 일부는 아감벤이 나치 수용소를 지나치게 일반화한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분석이 지나치게 어둡고, 저항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희박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조차 아감벤이 제기한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질문은 여전히 열려있다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을 걷는 아감벤을 상상해보자. 그는 수백 년 전 게토의 경계선과 21세기 난민 수용소의 철조망이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라는 것을 본다. 주권 권력은 항상 어떤 생명을 안에 포함하면서 동시에 밖으로 배제하는 경계선을 그어왔다. 문제는 그 경계선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감벤의 답은 유보적이다. 그는 확실한 해방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법과 생명, 권리와 존재, 포함과 배제의 관계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든 생명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철학자의 서재가 아니라, 난민촌의 철조망 앞에서, 구금 시설의 법적 공백 속에서, 재난 상황의 트리아지 현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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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출전:
-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1995)
- Giorgio Agamben, *State of Exception* (2003)
- Giorgio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2000)
-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Vol. 1* (1976)
- Carl Schmitt, *Political Theology* (1922)
-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