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1927년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제시한 Geworfenheit는 단순한 철학 개념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을 언어적으로 응축한 창조물이다. 이 단어는 동사 werfen(던지다)의 과거분사 geworfen(던져진)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heit를 결합한 형태다. 직역하면 "던져진-상태-임" 정도가 되지만, 이는 하이데거가 의도한 실존적 깊이를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독일어에서 geworfen은 완료된 수동 행위를 나타낸다. 누군가에 의해 던져졌으되, 그 던진 주체는 명확하지 않고, 던져진 사실만이 엄연히 존재한다. 여기에 -heit라는 추상화 장치가 더해지면서, 이 '던져짐'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존재론적 상태로 전환된다. 우리는 이미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던져져 있으며, 이 던져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번역의 난관: 수동성과 사실성의 이중주
Geworfenheit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은 철학적 통찰의 손실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한국어 번역어 "피투성(被投性)"은 한자어의 간결함으로 '던져짐을 당함'이라는 수동성을 포착하지만, 독일어 원어가 지닌 현상학적 직접성을 잃는다. '투(投)'자가 지닌 의도성과 목표지향성은 오히려 하이데거가 강조한 무근거성(Grundlosigkeit)을 희석시킨다.
영어권에서는 thrownness라는 조어를 사용한다. thrown(던져진)에 추상명사 접미사 -ness를 붙인 형태로, 독일어 구조를 충실히 모방했다. 하지만 영어의 throw는 독일어 werfen보다 물리적 투척의 이미지가 강해서, 실존적 무게감이 약화된다. 프랑스 번역어 déréliction(유기됨, 버려짐)은 장-폴 사르트르가 선택한 용어로, 라틴어 derelictio(포기, 유기)에서 온 말이다. 이는 '던져짐'보다 '버려짐'에 방점을 찍어 실존주의적 고독과 불안을 더 부각시킨다.
일본어 번역 "피투성(被投性)"은 한국어와 동일한 한자를 쓰지만, 일본 철학계에서는 "투げ込まれた状態"(던져넣어진 상태)라는 순일본어 풀이도 병행한다. 이는 ge-의 완료성과 hinein(안으로)의 공간성을 모두 살리려는 시도다. 흥미롭게도 중국어 번역 "被抛性(bèi pāo xìng)"은 '던져짐'보다는 '내팽개쳐짐'에 가까운 抛를 써서, 우연성과 무관심의 뉘앙스를 강화한다.
실존의 사실성: 선택하지 않은 출발점
하이데거에게 Geworfenheit는 현존재(Dasein)의 세 가지 근본 실존범주 중 하나다. 다른 두 가지인 기투(企投, Entwurf)와 퇴락(頹落, Verfallen)과 함께, 피투성은 우리가 항상 이미(immer schon) 특정한 세계 안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성(Faktizität)을 가리킨다. 우리는 출생 시기, 장소, 가족, 언어, 문화, 역사적 시대를 선택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존재를 시작한다.
『존재와 시간』 제29절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자신을 존재하도록 내맡겨져 있다(überantwortet)"고 말한다. 이 überantwortet(넘겨지다, 맡겨지다)라는 동사 역시 수동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떠맡을 수밖에 없지만, 그 출발 조건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다. 이 근원적 수동성이 바로 피투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피투성은 단순한 결정론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피투성과 기투성이 변증법적으로 얽혀 있다고 본다. 우리는 던져진 상태로부터 미래를 향해 자신을 기투(企投, entwerfen)한다. 던져진 조건은 우리를 제약하지만, 동시에 우리 가능성의 지평이기도 하다. 1920년대 독일 노동자 가정에 태어난 사람과 귀족 가문에 태어난 사람은 전혀 다른 피투성을 갖지만, 각자는 자신이 던져진 바로 그 세계 안에서 가능성을 펼쳐나간다.
언어 속에 각인된 수동태의 존재론
독일어 문법 구조가 피투성 개념의 철학적 깊이에 기여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독일어는 수동태 형성이 매우 발달한 언어다. werden(되다) + 과거분사 구조는 행위의 주체를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고 행위의 결과 상태를 전경화한다. "Es wird geworfen"(던져진다)에서 "Es"는 비인칭 주어로, 누가 던지는지는 중요하지 않거나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던져짐이 일어났다'는 사태 자체다.
이는 인도-유럽어족의 중동태(middle voice) 전통과도 연결된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능동태(active)와 수동태(passive) 사이에 중동태가 있었다. 중동태는 주체가 행위의 내부에 있으되, 완전히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애매한 영역을 표현했다. 언어학자 에밀 방베니스트(Émile Benveniste)는 『일반언어학의 제문제』에서 중동태가 "주체가 과정의 내부에 있으면서 그 과정에 영향을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분석했다. Geworfenheit의 ge-접두사가 만드는 완료 수동 구조는 이러한 중동태적 뉘앙스를 현대 독일어에서 되살린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우리가 세계에 "뿌리박혀 있다(enraciné)"고 표현했는데, 이는 피투성의 신체적 차원을 포착한다. 우리는 추상적 의식이 아니라 구체적 신체로서 세계에 던져져 있다. 신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초의 '주어진 것'이며, 모든 경험의 앵커포인트다.
현대적 울림: 알고리즘에 던져진 존재
21세기에 Geworfenheit는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알고리즘의 세계에 던져진다. SNS 추천 알고리즘, 검색 엔진의 필터 버블, 유튜브의 자동재생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정보 환경을 구성한다. 우리는 이 알고리즘적 피투성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타자를 만난다.
한국 사회에서 피투성은 특히 첨예하다. 출생 코호트에 따라 "88만원 세대", "N포 세대", "MZ세대"로 명명되는 현상은 역사적·경제적 조건에 던져진 세대의 집단적 피투성을 보여준다. 1990년대생은 IMF 외환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에 던져졌고, 2000년대생은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당연한 세계에 던져졌다. 이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자기 이해와 미래 기획을 수행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태어난 Z세대는 또 다른 종류의 피투성을 경험한다. 그들은 이전 세대가 만든 생태적 부채를 물려받았으며, 이는 그들의 미래 가능성 자체를 제약한다. "기후 불안(climate anxiety)"은 바로 이 세대적 피투성에 대한 실존적 반응이다.
언어적 저항: 피투성을 명명하는 시도들
흥미롭게도 각 문화권에서 Geworfenheit를 번역하며 드러난 뉘앙스 차이는 실존적 조건에 대한 문화적 태도를 반영한다. 영어권의 thrownness는 실용주의적 태도로 '던져진 사실'을 받아들이는 뉘앙스가 있다. 프랑스어 déréliction은 가톨릭 전통의 '신에게 버려진 인간'이라는 신학적 배경을 환기하며, 무신론적 실존주의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한국어·일본어·중국어의 한자 번역어들은 유교적 천명(天命) 개념과 공명하면서도, 그것을 세속화하고 탈형이상학화한다.
언어철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는 "언어는 세계관"이라고 했다. Geworfenheit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각 언어는 자신의 존재론적 전제를 드러낸다. 수동태가 발달한 언어는 피투성의 수동성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능동성을 강조하는 언어는 이를 번역하며 불편함을 느낀다.
한국 현대시에서도 피투성의 언어적 변주를 발견할 수 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우리가 뿌리박힌 역사적 조건을,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시간적 피투성을, 기형도의 "빈집"은 상실과 결여로서의 피투성을 형상화한다. 이들은 하이데거의 개념을 직접 참조하지 않았지만, 한국어의 시적 자원을 동원해 유사한 실존적 통찰에 도달한다.
철학사 속 피투성의 계보
Geworfenheit는 하이데거의 독창적 발명이지만, 그 사유의 뿌리는 깊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moira)에 던져진 존재다. 그는 테베의 왕으로 태어났고, 신탁의 예언 속에 던져졌으며, 자신의 기원을 모른 채 성인이 되었다. 그의 비극은 바로 이 피투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전개된다.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peccatum originale) 개념은 일종의 신학적 피투성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라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던져진 채 태어난다. 이는 하이데거가 거부한 신학적 틀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유사하다. 차이는 하이데거의 피투성에는 구원의 약속이 없다는 점이다.
근대 철학에서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우리가 시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에 '던져진' 존재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시공간을 벗어난 경험을 할 수 없으며, 이는 우리 인식의 근본 조건이다. 칸트는 이를 비판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론적 지평으로 전환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불안의 개념』은 하이데거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불안(Angst)은 가능성 앞에 선 자유의 현기증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미 특정한 실존적 조건 속에 던져져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하이데거는 이 통찰을 Geworfenheit 개념으로 체계화했다.
피투성과 자유의 역설
하이데거의 피투성 개념이 제기하는 가장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는 자유와의 관계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조건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그 조건 속에서 선택하고 기획해야 한다. 이는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고 표현한 역설과 맞닿아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차이와 반복』에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게임의 규칙으로 게임을 한다"고 썼다. 이는 피투성의 게임 이론적 재해석이다. 체스 게임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이미 중반전이 진행된 체스판 앞에 앉게 된다. 기물의 배치, 상대의 전략, 게임의 규칙 모두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수는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피투성은 정체성 정치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인종, 성별, 계급, 국적이라는 사회적 범주에 던져진다. 이 범주들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만, 우리의 가능성을 구조화한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비판적 인종이론은 모두 이러한 피투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만드는 권력관계를 분석하며, 그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에서 "출생성(nat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는 세계에 던져지지만, 동시에 우리의 탄생은 세계에 새로움을 가져온다. 아렌트에게 피투성은 수동성의 조건이 아니라 행위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던져졌기에 시작할 수 있다.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결국 Geworfenheit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은 언어 자체의 피투성이다. 우리는 모국어라는 특정한 언어 체계에 던져진다. 한국어 화자로 태어난 사람은 주어-목적어-서술어 어순, 높임법 체계, 한자어와 고유어의 이중구조 속에서 세계를 경험한다. 이는 독일어 화자나 영어 화자와는 다른 방식의 세계-내-존재를 구성한다.
하지만 번역은 이 언어적 피투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다. Geworfenheit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은 불가능하면서도 필요하다. 번역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실패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언어적 한계를 발견하고, 타자의 언어적 가능성을 엿본다. 번역은 언어의 피투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려는 기투의 행위다.
21세기에 우리는 이중적 피투성 속에 있다. 한편으로는 특정 국가, 언어, 문화에 던져져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벌 자본주의, 디지털 네트워크, 인류세(Anthropocene)라는 행성적 조건에 던져져 있다. 하이데거의 Geworfenheit는 이 복잡한 조건을 사유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피투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정론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한 기획이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피투성을 떠안으면서만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썼다. 우리는 던져진 존재이되, 그 던져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