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 1885-1971)는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1920)에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근대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했다. 이 저작은 단순한 문학 이론서가 아니라 근대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서이기도 하다.
근대적 개인의 등장과 총체성의 해체
루카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대는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총체성의 시대'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보여주듯, 개인의 운명과 공동체의 운명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총체성은 해체되고, 개인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서게 된다. 마치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개인이 더 많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더 큰 외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것과 같다.
소설 - 근대적 개인의 자화상
소설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개인의 문제적 존재 양상을 형상화하는 문학 장르다. 서사시의 영웅이 공동체의 가치와 일치하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면, 소설의 주인공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모르는 채 방황한다. 돈키호테가 이미 사라진 기사도 정신을 추구하며 현실과 부딪히는 모습이나, 파우스트가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갈망하면서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이 그 전형이다.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
루카치는 소설의 형식 자체가 근대 사회의 모순을 담아낸다고 보았다. 소설의 산문적 성격, 일상적 현실에 대한 세밀한 묘사, 개인의 내면 심리에 대한 탐구 등은 모두 총체성이 해체된 근대 세계의 특징을 반영한다. 시의 운율이나 서사시의 장엄함과 달리, 소설의 산문은 분열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현대인들이 시보다 소설을 더 친숙하게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러니와 성찰
소설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는 아이러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주인공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하게 관찰한다. 이러한 이중적 시선은 총체성을 상실한 근대인의 자기 성찰적 의식을 반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처럼, 소설은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삶에 대해 사유하는 근대인의 의식 구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시간 의식과 역사성
루카치는 소설이 시간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서사시가 영원한 현재 속에서 펼쳐진다면, 소설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복잡하게 얽힌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주인공의 성장과 변화, 기억과 기대, 후회와 희망 등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소설의 시간 구조와 닮아 있다.
소설의 한계와 가능성
루카치는 소설이 근대 사회의 모순을 충실히 반영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명확하다고 보았다. 소설은 총체성을 복원할 수는 없고, 다만 그 상실을 의식화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의식화 자체가 소설의 가치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 시대의 모순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
루카치의 소설 이론은 문학을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인주의가 더욱 심화되고 공동체적 가치가 약화된 현대 사회에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의 실존적 고민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학 장르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요인용문
"별이 총총한 하늘은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이며, 별빛이 그 길들을 밝혀준다. 모든 것이 새롭고 그러면서도 알기 쉽고, 모험으로 가득하면서도 자기 것이다."
"소설은 성숙한 남성성의 서사시이다. 즉 삶이 더 이상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개인이, 의미를 찾기 위해 나서는 편력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형식은 세계에 대한 초월론적 무연고성의 표현이다."
"아이러니는 소설가의 자유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신에 대한 부정적인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시간은 소설의 저항력이다. 왜냐하면 시간만이 희망 없는 투쟁에서 일어나는 무질서를 분리시키고 선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25 아트앤스터디 + claude.ai, CC BY 4.0
이 저작물은 카피레프트(Copyleft) 정신을 따르며, 출처 표시만 하면 누구나 복제, 배포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