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증여론』(Essai sur le don, 1925)은 20세기 인류학의 고전 중 하나로,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교환 원리를 파헤친 작품이다. 이 책은 단순히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적 유대와 권력 관계의 메커니즘을 밝혀낸 획기적인 연구서다.
증여의 세 가지 의무
모스는 증여 현상을 분석하면서 세 가지 핵심적인 의무를 발견했다. 첫째는 '주는 의무'다.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명절이면 선물을 주고받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내는 것이 이와 같은 맥락이다.
둘째는 '받는 의무'다. 선물을 거부하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며, 때로는 적대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상사가 주는 선물을 거절하기 어려운 것처럼, 받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관계를 인정하고 유지하는 방식이 된다.
셋째는 '되갚는 의무'다.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등가교환이 아니라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된다.
포틀래치와 권력의 게임
모스가 특히 주목한 것은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의례였다. 이는 족장들이 경쟁적으로 재물을 나누어주거나 아예 파괴해버리는 극단적인 증여 의례다.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확립하는 치밀한 권력 게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나 부유층의 기부 문화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명예를 얻는 전략적 행위의 성격을 갖는다. 재벌 가문이 미술관을 세우거나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장경제 이전의 교환 원리
모스는 현대의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이전 사회에서는 증여가 경제활동의 핵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순수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장교환과 달리, 증여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관계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전체적 사회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결혼 지참금은 단순히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두 가문 간의 동맹을 맺고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는 복합적 행위였다. 현재도 한국 사회의 혼수 문화나 사업가들 간의 골프 접대 같은 것들이 순전히 경제적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혜성과 사회적 유대
증여론의 핵심은 '호혜성'이라는 개념이다. 인간 사회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망 속에서 유지되며, 이런 교환을 통해 사회적 유대가 강화된다. 모스는 이를 통해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상에서도 이는 쉽게 확인된다. 직장 동료들과의 커피 한 잔 사기, 친구와의 밥값 번갈아 내기, 이웃과의 반찬 나누기 같은 소소한 교환들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돈으로 정확히 계산하면 손해일 수도 있지만, 관계의 측면에서는 투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증여
모스는 현대 사회에서도 증여의 논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정책도 일종의 증여로 볼 수 있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정당성과 사회적 안정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관계다.
기업의 CSR 활동도 마찬가지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들이 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명목이지만, 동시에 기업 이미지 개선과 사회적 영향력 확대라는 실질적 이익을 얻는다.
증여론이 던지는 질문들
모스의 증여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로 해석하려는 경제학적 사고가 과연 인간 사회의 전부를 설명할 수 있을까? 효율성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인간다운 관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최근 공유경제나 크라우드펀딩 같은 새로운 경제 형태들도 단순한 시장교환을 넘어선 증여적 성격을 보인다. 사람들이 우버나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욕구도 반영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
모스는 미래 사회가 순수한 시장경제도, 완전한 증여경제도 아닌 혼합된 형태를 가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보장하면서도 사회적 연대와 상호부조의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와 상호부조, 마스크 나눔이나 생필품 지원 같은 활동들은 여전히 인간 사회에 증여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가 증대되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모스의 통찰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인용문
"증여, 반대증여, 되갚음의 의무는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이 세 가지 의무는 사회계약의 기초를 이루며, 이를 통해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된다."
"포틀래치에서 중요한 것은 파괴의 크기가 아니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다. 더 많이 줄 수 있는 자가 더 큰 권력을 갖는다."
"순수한 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증여 뒤에는 반드시 되갚음에 대한 기대가 숨어있다."
"시장경제는 인간의 자연상태가 아니다. 증여와 교환을 통한 사회적 유대가 인간 문명의 원형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증여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보장제도와 상호부조의 형태로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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