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1991)는 근대성의 기본 전제들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도발적인 작품이다. 과학기술학(STS)의 대표적 학자인 라투르는 이 책에서 인간과 자연, 문화와 자연, 주체와 객체라는 근대적 이분법이 실제로는 허구였음을 논증한다.
근대성의 구성과 정화 작업
라투르에 따르면 근대인들은 두 가지 상반된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왔다. 하나는 '번역'(translation) 작업으로,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를 끊임없이 혼합하고 연결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정화'(purification) 작업으로, 이렇게 혼합된 것들을 다시 순수한 범주로 분리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에어컨의 발명을 생각해보자. 에어컨은 물리학적 원리(자연), 인간의 쾌적함에 대한 욕구(문화), 전기 기술(기술), 경제적 이익(사회) 등이 복잡하게 얽힌 혼종적 네트워크의 산물이다. 하지만 근대인들은 이를 순수한 기술적 발명품으로 범주화하려 한다.
혼종체의 증식과 근대적 분리의 한계
문제는 근대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혼종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오존층 파괴,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과 같은 현상들은 더 이상 자연/문화, 과학/정치의 경계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존재들이다.
라투르는 이를 '준객체'(quasi-objects) 또는 '준주체'(quasi-subjects)라고 부른다. 이들은 완전히 객관적이지도, 완전히 주관적이지도 않은 존재들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 해도 생물학적 실체이면서 동시에 경제, 정치,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행위자가 아닌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등장
라투르는 이러한 혼종체들을 설명하기 위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을 제시한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도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을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행위자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 받는 정보, 심지어 걷는 길까지 결정한다. 인간과 스마트폰은 서로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근대 헌법의 모순
라투르는 근대성을 일종의 '헌법'으로 이해한다. 이 헌법은 자연과 문화를 분리하고, 과학은 정치와 무관하며, 기술은 중립적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자들이 정치적 결정에 관여하고, 정치인들이 과학적 사실을 결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기후변화 논쟁이 대표적 사례다. 이는 순수한 과학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입장, 기술적 가능성이 복잡하게 얽힌 혼종적 논쟁이다. 그럼에도 근대적 사고는 여전히 '객관적 과학'과 '주관적 정치'를 분리해서 이해하려 한다.
대칭적 인류학의 제안
라투르는 '대칭적 인류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근대인과 비근대인, 서구와 비서구를 동등하게 다루는 관점이다. 근대인들도 결국 토템과 페티시를 숭배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토템은 '객관성', '합리성', '진보'라는 이름을 가질 뿐이다.
과학 실험실을 인류학적으로 관찰해보면, 과학자들도 복잡한 의례와 신화를 통해 '사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도 자연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술과 해석을 통해 구성된 것이다.
정치적 함의와 새로운 실천
이러한 인식은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만약 우리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면, 근대성을 넘어서려는 포스트모던적 시도들도 무의미하다. 대신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혼종적 네트워크들을 인정하고, 이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같은 기술적 존재들을 단순히 중립적 도구로 보거나 악마화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해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혼종적 민주주의를 향하여
라투르가 제안하는 것은 '혼종적 민주주의'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도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민주주의다. 강도 그들의 대변인(spokesperson)을 갖고, 의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환경주의를 넘어선다. 기술, 자연, 사회의 복잡한 얽힘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상상하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정치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라투르의 이 작품은 단순한 학술적 논의를 넘어 우리 시대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기후변화,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 21세기의 핵심 이슈들은 모두 라투르가 말하는 혼종체들이다. 이들을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사고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주요 인용문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실천 세트를 발전시켜왔다: 번역은 인간과 비인간의 혼종체를 만들어내고, 정화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론적 영역들을 창조해낸다."
"근대 헌법은 혼종체들의 증식을 허용하는 동시에 그들의 존재를 은폐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혼종체들을 민주주의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