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의 『탈근대의 조건: 지식에 관한 보고서』(La Condition postmoderne: Rapport sur le savoir, 1979)는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저작이다. 원래 캐나다 퀘벡 정부의 의뢰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정보화 시대 지식의 위상 변화를 분석하면서,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이라는 유명한 포스트모던의 정의를 제시했다. 리오타르는 계몽, 진보, 해방이라는 근대의 거대한 이야기들이 더 이상 설득력을 잃어버린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고, 이는 이후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근대성과 지식의 정당화 문제
리오타르가 제기한 핵심 질문은 "지식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이다. 근대 사회에서 지식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메타서사" 또는 "거대서사"에 의존했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진보를 통한 인류 해방을, 헤겔주의는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을,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계급 없는 사회 실현을 약속했다. 이러한 거대서사들은 개별 지식들에게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는 일종의 정당화 장치였다.
예컨대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왜 이걸 배워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근대 사회는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기 위해" 혹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라는 대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개인의 학습은 더 큰 역사적 프로젝트의 일부였고, 그 프로젝트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인류의 해방 서사 속에 위치한 의미 있는 것이었다.
거대서사의 종언과 탈근대의 도래
리오타르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거대서사들이 설득력을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는 이성과 과학의 진보가 반드시 인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소련의 전체주의는 해방의 서사가 오히려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서구 선진국들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사회적 불평등과 소외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인류 해방을 위해 공부하라"고 말하면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SNS 시대의 청년들은 개인의 성공, 자기계발, 스펙 쌓기에 더 관심이 있다. 지식은 보편적 해방이 아니라 개인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탈근대의 조건이다.
과학적 지식과 서사적 지식
리오타르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을 구분했다. 하나는 과학적 지식으로, 진술의 진위를 따지고 객관적 검증을 요구하는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서사적 지식으로, 공동체의 신화, 전설, 이야기를 통해 전승되는 실천적 지식이다. 근대 과학은 서사적 지식을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배척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과학 자신도 정당화를 위해서는 서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학은 "진리 추구를 통한 인류 행복"이라는 서사, "이성의 해방적 진보"라는 서사를 필요로 한다. 과학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왜 과학을 해야 하는가"에 답할 수 없고, 결국 자신이 배척했던 서사의 형식을 빌려야 한다. 이것이 리오타르가 지적한 지식의 정당화 문제였다.
오늘날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과학 연구는 국가나 기업의 자금 지원에 의존하는데, 이들은 "진리 추구"보다는 "실용적 성과"를 요구한다. 제약회사가 지원하는 의학 연구는 공익보다 수익성을 우선할 수 있다. 빅테크 기업의 AI 연구는 인류 복지보다 플랫폼 독점을 목표로 할 수 있다. 지식은 더 이상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이해관계의 산물이 되어간다.
언어게임과 불일치의 철학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을 빌려와 탈근대 지식을 설명했다. 언어게임이란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언어 실천의 형식들을 말한다. 과학의 언어게임, 윤리의 언어게임, 예술의 언어게임은 서로 다른 규칙으로 작동하며, 이들을 하나의 메타규칙으로 통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의사가 "이 치료법은 통계적으로 효과적입니다"라고 말할 때와 환자가 "하지만 나는 자연요법을 원해요"라고 말할 때, 이 둘은 서로 다른 언어게임을 하고 있다. 의사는 과학적 효율성의 게임을, 환자는 개인적 가치와 의미의 게임을 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다.
탈근대 사회는 이러한 언어게임들의 불일치를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다. 하나의 거대서사로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폭력이 된다. 리오타르는 차이와 불일치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서로 다른 게임들이 경합하고 충돌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성과 혁신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정보화 사회와 수행성의 기준
리오타르가 주목한 또 다른 현상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정보화 사회였다. 컴퓨터와 데이터베이스의 발달로 지식은 점점 더 정보의 형태로 축적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제 지식은 "참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효율적인가 비효율적인가", 즉 수행성(performativity)의 기준으로 평가된다.
대학 교육을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진리 탐구나 교양 함양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취업률, 연봉, ROI(투자 대비 수익)로 평가받는다. 어떤 전공이 "좋은 전공"인지는 그것이 얼마나 취업에 유리한지로 결정된다. 지식의 내재적 가치는 사라지고 도구적 효용만 남는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R&D 부서는 "진리 발견"이 아니라 "특허 건수", "제품 출시 속도"로 평가받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콘텐츠의 진실성이나 교육적 가치가 아니라 클릭률과 시청 시간으로 추천을 결정한다. 모든 것이 수행성의 논리, 즉 "얼마나 효율적으로 결과를 산출하는가"의 논리에 지배당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추세에 우려를 표했다. 수행성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순수 학문, 예술, 인문학, 비판적 사유—이 주변화된다. 그는 이를 "테러"라고까지 표현했는데, 효율성이라는 단일 기준이 모든 다양성을 억압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라고 본 것이다.
탈근대의 정치학: 불일치의 정당성
그렇다면 거대서사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리오타르는 합의(consensus)보다 불일치(dissensus)를 강조했다. 모두가 하나의 진리, 하나의 가치에 동의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탈근대의 윤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리오타르는 "모든 것이 똑같이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각의 언어게임이 자신의 규칙에 충실할 것을, 그리고 다른 게임의 규칙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과학은 과학의 규칙을, 예술은 예술의 규칙을, 정치는 정치의 규칙을 지키되, 어느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온라인 공론장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매일 경험한다. 트위터에서 과학자가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 누군가는 도덕적 관점에서, 다른 누군가는 정치적 관점에서, 또 다른 이는 종교적 관점에서 반응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게임을 하고 있고, 종종 불일치에 빠진다. 리오타르의 관점에서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다원성의 표현이다. 문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침묵시키려 할 때 발생한다.
한계와 비판
리오타르의 탈근대론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첫째, 거대서사를 거부하면서도 "거대서사의 종언"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서사를 제시하는 것 아니냐는 자기모순 지적이 있었다. 둘째, 모든 언어게임을 동등하게 취급하면 파시즘이나 인종차별 같은 명백한 악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윤리적 우려가 제기되었다. 셋째, 하버마스 같은 비판이론가들은 리오타르가 합의와 소통의 가능성을 너무 쉽게 포기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리오타르의 진단이 서구 선진국 중심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탈식민 국가들에게는 여전히 민족 해방, 경제 발전, 민주화 같은 "거대서사"가 절실한 과제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를 충분히 경험한 자들의 사치스러운 회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리오타르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실제로 단일한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파편화되고 다원화된 시대로 이행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각자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면서 "공통의 현실" 자체를 해체한다. 팬덤 문화는 각자의 취향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보편적 문화 정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것이 좋든 나쁘든,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탈근대의 조건이다.
동시대적 의미: 알고리즘 시대의 지식
리오타르가 1979년에 예견한 정보화 사회는 2020년대 플랫폼 자본주의로 현실화되었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은 "진리"가 아니라 "관련성"과 "인기도"로 지식을 서열화한다.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은 교육적 가치가 아니라 시청 시간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넷플릭스는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개인화된 취향 만족을 추구한다.
지식은 점점 더 맞춤형이 되고 파편화된다. 백신에 대한 과학적 합의가 있어도, 알고리즘은 반백신 음모론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압도적 과학적 증거가 있어도, 부정론자들은 자신들만의 정보 생태계 속에서 살아간다. 리오타르가 말한 언어게임들의 불일치는 이제 필터 버블과 에코 체임버로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오타르의 물음은 더욱 절박해진다. 공통의 토대가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거대서사 없이도 정의와 연대는 가능한가? 수행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비효율적이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탈근대의 조건』은 이러한 질문들에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할 조건, 즉 거대서사의 종언과 언어게임들의 불일치라는 조건을 명료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좌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요인용문
"나는 탈근대를 거대서사들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한다."
"과학적 지식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 과학은 서사적 지식과 구별되는 것으로 자신을 제시하지만, 그 정당화를 위해서는 자신이 배척한 서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식의 위상은 정보화 시대에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지식은 더 이상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교환되고 거래되는 정보가 되었다."
"언어게임들 사이에는 보편적 메타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게임은 자신의 규칙을 가지며, 이들을 하나의 규칙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테러가 된다."
"컴퓨터화의 진정한 문제는 정보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수행성의 기준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효율적인가'라는 질문이 '참인가', '정의로운가', '아름다운가'라는 질문들을 대체한다."
"합의는 폭력의 한 형태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합의가 아니라 불일치, 즉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다."
"계몽의 서사는 인류를 미신과 무지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약속했다. 헤겔의 서사는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한 자유의 실현을 약속했다. 마르크스의 서사는 계급 투쟁을 통한 보편적 해방을 약속했다. 이 모든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행성의 논리는 새로운 종류의 합법성을 생산한다. 더 이상 '무엇이 참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효율적인가'가 정당화의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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