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독일 산골 여관의 벽로가 붉게 타오르는 저녁. 백발의 하이데거는 자신의 검은 숲 산장 근처 여관에서 초대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문이 열리고 두꺼운 수염을 가진 마르크스가 들어선다. 두 철학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하이데거: 마르크스 선생,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과 나는 인간 실존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죠. 특히 기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르크스: 오랜 논쟁 상대를 직접 만나게 되어 흥미롭군요, 하이데거 교수. 내가 살던 19세기 산업혁명기와 당신의 20세기는 기술의 발전 정도가 다르지만, 기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겠지요.
하이데거: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기술은 존재의 은폐이자 폭력입니다. 현대기술은 세계를 '대기중인 자원'(Bestand)으로 환원시켜 버립니다. 숲은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목재 산업의 원료가 되고, 강은 수력발전소의 에너지원이 되죠. 인간마저 '인적자원'으로 전락합니다.
마르크스: 당신은 지나치게 낭만적입니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적 관계가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기술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도구가 되지만, 생산력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물질적 필요로부터 해방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내가 쓴 바와 같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할 수 있으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이데거: 그런 유토피아적 비전은 기술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생산력 발전도 결국 세계를 계산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형이상학적 폭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제가 지적했듯이, 현대 기술의 본질은 '게슈텔'(Gestell)로, 모든 것을 추출 가능한 자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세계관입니다.
마르크스: 하지만 기술 없이 인간이 자연의 필연성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자본론』에서 분석했듯이, 기계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잠재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혜택이 자본가에게 독점된다는 것이죠.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통해 기술의 해방적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기술적 사고방식 자체입니다. 소유 형태가 바뀐다고 해서 계산적 사고와 효율성 추구의 폭력성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인간은 먼저 존재에 대한 시적 사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 빈 배로는 시를 쓸 수 없습니다, 교수님.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공허한 관념에 불과합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 물질적 충족이 정신적 풍요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이야말로 근대의 환상입니다. 오히려 기술발전은 인간을 더 깊은 불안과 고향상실로 몰아넣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해방은 기술로부터가 아니라, 기술 너머를 사유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마르크스: 그렇다면 우리의 차이는 명확하군요. 나는 기술을 통한 물질적 해방이 정신적 해방의 전제조건이라고 보고, 당신은 기술 자체가 정신적 예속의 원인이라고 보는군요.
하이데거: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인간의 해방을 고민했다는 점은 같으니, 이 산골 여관에서 와인 한 잔 함께 하는 것으로 타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