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20년대 후반 독일 프라이부르크 근교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집필하던 날들을 배경으로 한다. 철학자의 고독한 사유와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향한 그의 열정적 탐색이 이 글에 깔려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지적 혼란과 하이데거 자신의 내면적 갈등이 이 글의 정서적 바탕을 이룬다.)
새벽녘, 슈바르츠발트의 숲은 아직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오두막 앞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의 손에는 수많은 메모로 가득 찬 공책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는 제목 아래 여러 단락이 쓰여 있었다.
"서양 철학은 존재를 망각했다." 그는 잠시 멈추어 숲의 깊은 숨결을 들었다. "플라톤 이래로, 우리는 존재자들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존재 자체를 묻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하이데거의 내면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십 년 넘게 품어온 질문에 마침내 형태를 부여하고 있었다. 오두막 주변의 고요함이 그의 사유를 더욱 선명하게 했다. 여기서는 도시의 소음도, 대학의 관습적 사고방식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내리쬐었다. 그는 펜을 들고 쓰기 시작했다.
"현존재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진 존재자다..."
문득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무언가 부족했다. 언어가 그의 생각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어의 일상적 단어들로는 그가 포착하려는 존재의 심연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 다시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언어의 집에 거주한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집은 너무 좁아졌다. 나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오전 내내 그는 자신의 사전에서 단어들을 찾아보았다. '존재(Sein)', '현존재(Dasein)', '존재자(Seiende)'... 이 단어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그의 철학의 핵심이었다. 그는 종이에 이 단어들을 적고, 그 사이의 관계를 화살표로 연결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존재자들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지만, 존재 자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항상 물러나 있다. 은폐되어 있다."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하이데거는 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꺼내 몇 페이지를 읽었다. 그리스어 원문을 천천히 발음하면서, 그는 자신의 사유가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함을 느꼈다. 철학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했다.
오후, 숲속 산책로를 걷는 동안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알레테이아... 퓌시스... 로고스..." 그때 그는 작은 숲 속 빈터에 도착했다. 한 그루의 오래된 참나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이 나무는 그저 있다."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나무 앞에 멈춰 서서 그 거친 껍질을 만졌다. 이 나무는 아마도 백 년도 더 된 것 같았다. 그것은 전쟁도, 혁명도, 인간의 모든 역사적 변화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이다. 반면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자다.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 하이데거는 생각했다. "다른 존재자들은 단지 눈앞에 있지만,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투사한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명료함이 찾아왔다. 그는 서둘러 오두막으로 돌아가 책상에 앉았다. 밤이 깊어가는 동안, 하이데거는 쉬지 않고 글을 썼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에 관계하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항상 이미 자신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 이해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투사한다..."
그는 잠시 멈추어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들었다.
"세계 내 존재로서의 현존재... 우리는 세계에 던져져 있다. 이 피투성(Geworfenheit)은 우리의 근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우리는 이미 항상 세계 안에 있다."
자정이 지나고, 창밖으로 별들이 빛났다. 하이데거는 촛불 아래서 계속 글을 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존재와 시간, 불안과 염려, 양심과 결단... 이 모든 개념들이 하나의 체계로 모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향한 존재..." 그는 계속 써내려갔다.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죽음이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본래적 실존에 도달할 수 있다."
새벽 두 시, 하이데거는 마침내 펜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은 피로했지만, 마음은 맑았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슈바르츠발트의 밤하늘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무수한 별들로 가득했다.
"존재자들 너머에 있는 존재..." 그는 중얼거렸다. "별들 너머에 있는 어둠과 같이."
다음 날 아침, 그는 엘프리데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엘프리데, 어젯밤 나는 마침내 그것을 붙잡았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내게 열렸어. 현존재 분석론이 존재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겠네. 우리는 먼저 묻는 자 자신을 이해해야만 해..."
그는 잠시 펜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숲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내게 축복과도 같네. 도시의 소음, 대학의 논쟁,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으니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때로는 외로움이 깊어져. 자네가 여기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편지를 마친 후, 하이데거는 다시 그의 원고로 돌아갔다. 오전 내내 그는 전날 밤에 떠올린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는 현존재의 구조를 더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현존재는 세 가지 기본 구조를 가진다: 실존성(Existenzialität), 사실성(Faktizität), 퇴락(Verfallen)." 그는 각 개념을 자세히 설명했다. "실존성은 현존재가 항상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있다는 것을, 사실성은 현존재가 이미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것을, 퇴락은 현존재가 일상성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오가 되자, 하이데거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는 오두막 주변을 산책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멀리서 농부들이 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단순한 삶이 때로는 부러웠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존재와 더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도구적 존재..." 그는 생각했다. "망치는 망치질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사용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망치가 고장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대상'으로 바라본다."
오후, 하이데거는 다시 산책을 나갔다. 그는 작은 시냇가에 멈춰 서서 물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시간," 그는 중얼거렸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현존재의 시간성..."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하이데거는 시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깨달았다. 시간은 단순히 "지금들"의 연속이 아니다. 현존재의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얽혀 있는 복잡한 구조다.
"미래로부터 오는 현재 속의 과거..." 그는 생각했다. "현존재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투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떠맡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재 속에서 일어난다."
시냇가에 앉아, 그는 공책에 몇 줄을 적었다.
"현존재의 시간성은 미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나가 있다. 이것이 '기투(Entwurf)'이다. 동시에 우리는 항상 이미 세계에 던져져 있다. 이것이 '피투성(Geworfenheit)'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속에서 사물들과 만난다. 이것이 '퇴락(Verfallen)'이다."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저녁을 간단히 준비한 후,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유를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1부: 현존재의 해석학을 통한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의 전개," 그는 큰 제목을 적었다. "제1편: 현존재의 예비적 기초분석."
그는 각 장의 제목을 구상했다. 세계-내-존재, 세계의 세계성, 현존재와 일상성, 불안과 염려... 마침내 전체 구조가 그의 앞에 펼쳐졌다.
저녁이 되자, 하이데거는 오두막 앞 벤치에 앉아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맑고 고요했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 새로운 사유의 길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모두 위대한 사상가들이었지만, 그들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철학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해야 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공책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하는 것, 그것이 나의 과제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묻기를 망각했다. 이제 그 망각을 극복해야 할 때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무한한 하늘 앞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 도전하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명감.
"철학은 다시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결심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존재자에만 집중해왔다. 이제 존재 자체를 물어야 할 때다."
하이데거는 마지막으로 창문을 닫고 촛불을 껐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질문을 따라갈 것이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서양 철학이 망각한 그 근본적인 질문을.
별빛 아래, 슈바르츠발트의 숲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서양 철학의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