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파리의 한 카페.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이 앉아 있다. 그는 조르주 바타이유, 『태양 항문』『에로티즘』『성스러운 자』등의 저작으로 기존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파괴한 사상가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도 철학과 문학을 넘나들며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에로티즘과 죽음,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변증법을 탐구해왔다. 그의 눈빛은 예리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아트앤스터디의 공식 인터뷰어인 아트걸이 마주 앉으며 대화가 시작된다.)
아트걸: 선생님의 『에로티즘』을 읽고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로티즘을 단순한 성적 욕망이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문제로 다루셨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바타이유: 사람들은 에로티즘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합니다. 에로티즘은 단순히 육체적 쾌락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개별적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근본적 충동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립된 개체로 태어나 죽습니다. 하지만 에로티즘을 통해 그 고립을 일시적으로나마 극복하려 합니다.
아트걸: 그렇다면 에로티즘과 금기는 어떤 관계에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금기가 없다면 에로티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금기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근본적 특징입니다. 동물들에게는 금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만들어냈고, 바로 그 금기 때문에 위반의 쾌락이 탄생했습니다. 제가 『에로티즘』에서 강조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금기와 위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의미를 잃습니다.
아트걸: 선생님께서는 에로티즘을 육체적, 감정적, 성스러운 에로티즘으로 구분하셨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이 구분은 에로티즘의 복합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육체적 에로티즘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생식 기능과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 합니다. 감정적 에로티즘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두 존재가 하나가 되려는 충동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에로티즘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체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모든 에로티즘의 궁극적 목표는 개별성의 해체, 즉 죽음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아트걸: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바타이유: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금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기피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죽음에 대해 강렬한 매혹을 느끼기도 합니다. 전쟁 영화나 스릴러 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적 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기가 강할수록 그것을 위반했을 때의 쾌락도 강해집니다.
또 다른 예로, 종교적 금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에서 신성모독은 가장 큰 금기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스러운 자』에서 다룬 질 드 레는 바로 이 신성모독을 통해 극한의 쾌락에 도달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입니다.
아트걸: 그런데 선생님께서 사드 후작에 대해 쓰신 글들을 보면, 그를 단순한 변태가 아닌 철학자로 평가하셨는데요?
바타이유: 맞습니다. 사드는 종종 오해받는 인물입니다. 그를 단순히 성적 변태나 사디즘의 창시자로만 보는 것은 그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드는 계몽주의 이성의 한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상가입니다. 그는 이성이 추구하는 질서와 도덕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이성의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소돔의 120일』이나 『쥐스틴』같은 작품들은 단순한 포르노그래피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면을 철저히 탐구한 철학적 실험입니다. 사드가 보여준 것은 완전한 자유가 어떻게 완전한 파괴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파괴 속에서 어떤 진리가 드러나는지입니다.
아트걸: 그런데 선생님의 이론에 따르면, 금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바타이유: 정확히 맞습니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딜레마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적 해방을 외치며 모든 금기를 파괴하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에로티즘은 힘을 잃습니다. 금기가 사라지면 위반의 쾌락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재 서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성적 자유가 확대될수록 오히려 성적 무력감이나 권태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면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금기와 위반 사이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트걸: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이런 긴장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타이유: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에로티즘마저도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에로티즘은 상품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근본적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술이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여전히 금기와 위반의 경계에서 작동합니다. 예술가는 기존의 형식과 관념을 위반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을 창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로티즘의 본질과 통합니다.
아트걸: 그렇다면 선생님이 말하는 '내적 체험'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기존의 종교적 체험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바타이유: 내적 체험이란 이성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의 체험을 말합니다. 에로티즘, 종교적 황홀경, 예술적 창조의 순간 등에서 우리는 일상적 자아의 경계를 벗어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개별적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고 무한과 접촉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내적 체험은 기존의 종교적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저는 신 없는 신비주의를 추구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시대에, 우리는 신 없이도 성스러운 체험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 체험』이라는 제 저서의 핵심입니다. 언어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체험 말입니다.
아트걸: 선생님께서는 또한 '소모'와 '탕진'의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셨는데요?
바타이유: 맞습니다. 이것은 제 사상의 또 다른 핵심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축적과 생산성만을 추구합니다. 모든 것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모'에 대한 근본적 욕구가 있습니다.
포틀래치 의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북미 원주민들이 행하는 이 의식에서는 엄청난 재물을 불태워버립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완전히 비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들은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체험합니다. 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축제에서 우리는 평소에 축적한 것들을 탕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의 본질입니다.
에로티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에로티즘은 자아의 '소모'를 통해 더 큰 존재와 합일하려는 충동입니다.
아트걸: 현대인들에게 이런 체험이 왜 중요한가요? 특히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바타이유: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체계화하려 합니다.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추구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기술 시대에는 인간마저도 정보 처리 기계처럼 취급받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합리적 질서를 넘어서려는 충동이 있습니다.
그것을 억압하면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겪는 우울증이나 무력감의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근본적 욕구, 즉 초월과 소모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로티즘과 내적 체험은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우리는 계산 가능한 존재를 넘어서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트걸: 선생님께서는 문학에서도 이런 철학을 구현하려 하셨는데, 『눈의 이야기』 같은 작품은 어떤 의도로 쓰신 건가요?
바타이유: 『눈의 이야기』는 제가 로르 앙젤미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에로틱 소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에로티즘의 철학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실험작입니다.
이 작품에서 저는 성적 행위와 죽음,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렸습니다. 주인공들의 극단적 행위들은 기존의 도덕적 금기를 위반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성스러움에 도달하려는 시도입니다.
문학은 철학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문학은 직접 체험하게 만듭니다. 『눈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단순히 에로티즘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에로티즘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트걸: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사상이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현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바타이유: 사람들은 제가 방탕함을 옹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저는 무절제한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에로티즘은 깊은 성찰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모순과 마주하는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한 저를 허무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현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논리에만 매몰되지 마십시오. 때로는 '쓸모없는' 일들을 하십시오. 축제를 즐기고, 예술을 감상하고, 사랑에 빠지십시오.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금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동시에 금기를 존중하십시오. 금기와 위반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불가능한 것'의 철학입니다.
(카페 밖으로 파리의 저녁 풍경이 보인다. 바타이유는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바라본다. 그의 표정에는 깊은 사색과 함께 어떤 확신이 스며있었다. 금기와 위반, 에로티즘과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도전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