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베를린의 한 카페. 담배 연기가 자욱한 실내에서 두 학자가 마주 앉아 있다. 한 명은 섬세한 인상의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지멜, 다른 한 명은 냉소적인 표정의 미국 경제학자 토르스타인 베블런이다. 테이블 위에는 각자의 최신 저서가 놓여 있다.)
"베블런 교수, 당신의 『유한계급론』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화폐를 단순히 과시의 도구로만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지멜이 커피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
베블런은 비웃듯 웃으며 답했다. "지멜 교수, 당신은 화폐를 너무 이상화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보십시오. 부자들이 값비싼 시계를 차고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이유가 실용성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과시적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화폐의 본질은 아닙니다. 화폐는 인간을 물물교환의 구속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농부가 신발이 필요할 때 더 이상 신발 만드는 사람이 곡식을 원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죠. 화폐는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킨 위대한 발명입니다."
베블런이 담배를 피우며 반박했다. "자유라고요? 웃기는 소리군요. 화폐는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예속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무의미한 노동에 매달리고, 남들보다 더 비싼 물건을 사기 위해 빚을 집니다. 이것이 자유입니까?"
"그건 화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화폐를 사용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화폐는 본질적으로 중성적인 매개체입니다. 마치 언어처럼 말이죠. 언어 자체가 선악을 가지지 않듯, 화폐도 그 자체로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베블런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 추상적인 이론으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신흥 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황금 수저로 밥을 먹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개목걸이를 삽니다. 이런 물건들이 실제로 더 나은 기능을 제공합니까? 아니죠. 단지 '나는 이런 걸 살 수 있을 만큼 부자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뿐입니다."
지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과시적 소비가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화폐의 모든 측면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화폐는 사회적 거리를 조절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호텔에서 돈을 지불하면 직원들이 정중히 대해주지만, 개인적인 관계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객관적 거리감이야말로 현대 도시 생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입니다."
"흥미로운 관점이군요. 하지만 그 '객관적 거리감'이라는 것도 결국 계급 차이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아닐까요? 부자는 돈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를 둡니다. 이것이 사회적 화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화폐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계급을 고착화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분제 사회보다 훨씬 유동적인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중세 농노는 평생 농노였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돈을 벌어 사회적 지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베블런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부자의 자식은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의 자식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해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화폐는 오히려 계급을 더 교묘하게 재생산하는 도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는 인간의 선택권을 확대했습니다. 물물교환 시대에는 내가 가진 것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일치해야만 거래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화폐가 있으면 이런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자유의 확장입니다."
베블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멜 교수, 당신은 너무 낙관적입니다. 화폐가 주는 자유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선택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소비라는 새로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화폐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두 학자는 각자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카페를 떠났다. 창밖으로는 마차와 함께 최초의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