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독일의 한 카페. 창가 자리에 앉은 두 남자가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명은 단정한 복장의 노신사 칸트이고, 다른 한 명은 여유로운 표정의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다.)
"저 그림을 보시게." 칸트가 벽에 걸린 풍경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나 저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네. 미적 판단력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 능력이거든."
부르디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칸트 선생님, 그건 착각입니다. 저 그림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받은 교육과 성장한 계층의 문화적 코드 때문이에요. 만약 당신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저 그림보다는 실용적인 농기구에 더 관심을 보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네!" 칸트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미적 판단은 개념이나 이해관계와 무관한 순수한 감정이야. 장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교육이 필요한가? 노을의 색깔에 감동하는 데 계급이 중요한가?"
"바로 그런 생각이 문제입니다." 부르디외는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말하는 '순수한' 미적 감정이야말로 지배계층의 취향을 보편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이데올로기예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힙합을 좋아하는 것보다 '고급'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죠."
칸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음악의 질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 경험의 보편성을 말하는 거네. 바흐의 푸가든 민요든, 그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느끼는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르디외가 반문했다. "상류층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미술관에 가고 클래식 콘서트를 듣습니다. 그들의 '좋은 취향'은 타고난 게 아니라 문화자본의 상속이에요. 반면 노동자 계층은 그런 문화에 접근할 기회조차 없죠."
"그럼 자네는 미의 기준이 완전히 상대적이라는 건가?" 칸트가 물었다. "계급에 따라 아름다움이 달라진다면, 미적 소통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부르디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취향은 계급을 구별하는 도구예요. '세련된 취향'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방식이죠. 파리의 부르주아가 와인을 음미하는 것과 시골 농부가 막걸리를 마시는 것, 어느 쪽이 더 '고급'한 문화일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예술 교육은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칸트는 당황한 듯 물었다. "미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인간의 품성을 높인다고 생각했는데..."
"교육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부르디외가 설명했다.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화를 '올바른 교육'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문화적 위계질서가 재생산되는 거예요."
칸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공통된 감각이 있지 않을까? 자연의 숭고함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같은 것 말이야."
"그조차도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는 미소를 지었다. "산을 보고 '숭고하다'고 느끼는 것은 낭만주의 문학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실제로 18세기 이전에는 산을 두려운 존재로 여겼거든요."
"그렇다면 자네가 보기에 진정한 취향의 자유는 불가능한 건가?" 칸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부르디외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먼저 취향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그래야 진정한 문화 민주주의가 가능하죠. 모든 사람의 취향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의 관점도 일리가 있네. 다만 나는 여전히 인간에게는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보편적 능력이 있다고 믿네. 그것이 완전히 사회적 산물만은 아닐 거야."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같은 그림이었지만, 이제 그들의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