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독일 할레 대학의 어느 겨울 오후. 에드문트 후설은 자신의 서재에서 방금 완성한 『논리연구』 원고를 앞에 두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난로의 불빛이 책상 위의 잉크병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철학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후설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문득 이상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수학자로서, 그리고 철학자로서 추구해온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심리학주의의 늪에 빠져서 의식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구나."
그는 다시 원고를 펼쳤다. 『논리연구』에서 그는 논리학의 기초를 심리학적 사실에서 찾으려던 기존의 시도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더 큰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의식 그 자체를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후설은 책상 위에 놓인 잉크병을 들여다보았다. 이 잉크병을 보는 자신의 의식은 무엇인가? 잉크병 자체인가, 아니면 잉크병에 대한 의식인가? 그는 이 단순한 질문에서 거대한 철학적 혁명의 씨앗을 발견했다.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그가 종이에 적었다.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야말로 모든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후설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교수님, 오늘 강의에서 말씀하신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표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시는 건가요?"
후설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 지금 이 방에서 무엇을 보고 있나?"
"책상, 의자, 책들, 그리고 교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로 그것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들에 대한 자네의 의식, 자네의 체험을 보고 있는 것일까?"
제자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후설이 계속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의식'을 분리해서 생각해왔다네. 하지만 진정한 철학적 탐구는 이 둘이 만나는 지점, 즉 의식이 세계를 체험하는 바로 그 순간을 탐구해야 한다네."
"그렇다면 현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다. 나는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적 태도'를 중단하고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해야 한다."
후설은 잉크병을 다시 손에 들었다. "이 잉크병을 보게. 자연적 태도에서는 '잉크병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상학적 태도에서는 '잉크병이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바로 이 '나타남' 자체가 우리가 탐구해야 할 현상이다."
제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의식과 대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것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대상은 항상 의식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핵심이다."
후설은 창밖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의식의 각 순간도 고유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의식의 본질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상학의 과제였다.
"교수님, 그렇다면 이 새로운 철학 방법이 기존의 인식론이나 존재론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좋은 질문이다. 기존의 철학은 '무엇이 존재하는가?' 또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현상학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가?'를 묻는다. 이는 철학의 근본적인 관점 전환을 의미한다."
후설은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보게, 전통적인 인식론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현상학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상호 구성적인 관계에 있다고 본다. 의식 없는 대상도, 대상 없는 의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 방법을 통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후설의 얼굴에 확신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의식의 시간성, 공간성, 신체성... 그리고 무엇보다 타자와의 관계까지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의식 속에서 과거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제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하지만 교수님, 이런 방법이 과연 과학적일 수 있을까요? 너무 주관적인 것은 아닐까요?"
"아니다. 현상학은 가장 엄밀한 과학이 되고자 한다. 다만 그 엄밀성이 자연과학의 그것과는 다를 뿐이다. 우리는 의식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분석한다. 어떤 가설이나 이론적 전제 없이 말이다."
후설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눈송이들마저도 의식과 세계의 만남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보였다.
"자네도 한번 해보게. 지금 이 순간 자네의 의식을 관찰해보라. 나에 대한 지각, 내 말에 대한 이해,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물어볼지에 대한 기대...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지 않나?"
제자는 잠시 자신의 의식에 집중했다. "정말 그렇네요. 하나의 의식 속에서 여러 층위의 체험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의식의 복합적 구조, 그 속에서 일어나는 '종합'의 과정, 이 모든 것을 우리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후설은 자신이 오늘 이 대화를 통해 현상학의 기초를 더욱 명확히 할 수 있었다고 느꼈다.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이 방법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지만, 그는 이미 올바른 길을 찾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교수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이 현상학이 철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후설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이것이 철학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에 갇혀 있었다면, 현상학은 그 이원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열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길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같은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풍성하게 발전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라도 말이다."
제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교수님은 미래를 예견하시는 건가요?"
후설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다만 진리를 향한 열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어받을 사람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날 밤, 후설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나는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믿는다. 의식과 세계가 만나는 그 원초적 지점에서,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이 추구하는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