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겨울 저녁, 차가운 날씨에 몸이 움츠러든 주인공은 어머니가 건네준 홍차에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적셔 입에 넣는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어디선가 강렬한 기쁨이 밀려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황홀함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이 무엇인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고모 레오니가 항상 일요일 아침마다 주었던 마들렌 과자의 맛이었다. 수십 년 전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세계가, 한 입의 맛과 함께 통째로 되살아났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1927)는 이 한 장면으로 시작해서 일곱 권, 3,000페이지가 넘는 장대한 여정을 이어간다. 소설 속 화자 마르셀은 평생에 걸쳐 시간과 기억을 추적한다. 그가 찾으려는 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사라진 자아다. 그리고 그 자아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기억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자전적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거대한 철학적 탐구다. 그 물음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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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발적 기억과 비자발적 기억 — 의지로는 닿을 수 없는 곳
프루스트가 소설에서 가장 집요하게 파고드는 구분이 있다. 자발적 기억(mémoire volontaire)과 비자발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의 차이다.
자발적 기억이란 우리가 의도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려 할 때 작동하는 기억이다. "어린 시절 콩브레는 어땠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 떠오르는 것들. 그런데 프루스트에 따르면 이런 기억은 놀랍도록 빈약하다. 그것은 과거를 건조한 사진처럼 제시할 뿐, 과거가 지녔던 생생한 감각과 감정을 돌려주지 않는다. 머리로 기억하는 과거는 박제된 과거다.
반면 비자발적 기억은 의지와 무관하게 불쑥 찾아온다. 마들렌 과자의 맛처럼, 포석의 울퉁불퉁한 감촉처럼, 냅킨의 뻣뻣한 감촉처럼—감각이 방아쇠가 되어 기억이 터져 나온다. 이때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 재현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 속에 실제로 되살아나는 체험이다. 마들렌 과자를 입에 넣는 순간, 마르셀은 단지 콩브레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콩브레 안에 '있게' 된다.
이 구분은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과거 사건의 저장고라고 생각한다. 사진 앨범처럼, 파일 서랍처럼. 그러나 프루스트는 그 모델을 뒤집는다. 진정한 기억은 저장이 아니라 부활이다. 그리고 그 부활은 의지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감각이 열어주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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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르그송의 시간 — 시계가 측정할 수 없는 것
프루스트의 기억론은 당대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시간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지적 동시대인이 아니었다. 베르그송은 프루스트의 사촌 누이와 결혼한 실제 친척이기도 했다.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의지』(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와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1896)에서 두 가지 시간을 구분했다. 하나는 공간화된 시간, 즉 시계가 측정하는 시간이다. 1초, 1분, 1시간—이것은 균질한 단위로 잘린, 공간처럼 배열된 시간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것이 진짜 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짜 시간은 지속(durée)이다. 지속이란 우리가 내면에서 체험하는 시간으로, 흘러가면서 이전의 순간들을 녹여 담는 살아있는 흐름이다.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각각의 음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앞선 음표가 다음 음표 안에 울려 퍼지고, 그 울림의 연속이 하나의 멜로디를 만든다. 우리의 의식도 그렇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지속이다.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은 이 베르그송적 지속의 문학적 형상화다. 마들렌 과자가 마르셀에게 돌려준 것은 콩브레에 관한 정보가 아니었다. 콩브레의 지속, 즉 그 시간의 살아있는 질감이었다. 시계가 잰 시간은 아무리 되감아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이 열어주는 지속의 문은 과거를 현재 안에서 살아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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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아는 단수인가 — 여러 개의 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면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설의 화자 '나(마르셀)'는 고정된 인물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마르셀, 사랑에 빠진 마르셀, 사교계를 드나드는 마르셀, 노년에 진실을 깨닫는 마르셀—이 '나'들은 서로 연속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이질적이다.
프루스트는 이것을 소설 내내 명시적으로 말한다. 알베르틴을 사랑했던 마르셀과 알베르틴을 잃고 슬퍼하는 마르셀은 같은 사람인가. 그 사랑이 식어버린 뒤의 마르셀은 또 어떤 사람인가. 사랑이 사라지면 그 사랑과 함께 존재했던 '나'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
이것은 철학의 오래된 질문인 개인 동일성(personal identity)의 문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에서 자아를 탐구했을 때 고정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지각들의 묶음(bundle of perceptions)이었다. 생각, 감각, 감정의 연속적인 흐름이 있을 뿐, 그 아래에 불변하는 자아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흄의 통찰을 문학으로 살아냈다. 소설 속 마르셀이 발견하는 것은 단일하고 안정적인 자아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새로 태어나는 복수의 자아들이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이 복수의 자아들에 붙인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에는 기억만큼이나 다양하고 불연속적인 '나'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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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이라는 착각 — 질투와 상상력의 철학
프루스트 소설에서 사랑의 장면들은 아름다운 동시에 잔인하다.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 마르셀과 질베르트의 사랑,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사랑—이 모든 사랑은 한 가지 공통된 구조를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스완은 오데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오데트를 보티첼리의 그림 속 인물 시포라와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오데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사랑의 대상은 오데트라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스완의 상상력이 오데트에게 투사한 이미지였다. 나중에 그는 고백한다. "나는 내 인생의 수년을,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건만, 내 취향도 아닌 여자를 위해서 낭비했다."
이 냉혹한 인식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분석한 사랑의 구조와 겹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랑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프로젝트다. 나는 상대방이 자유 의지로 나를 선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상대방의 자유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이 모순이 사랑을 끝없는 불안과 질투로 만든다.
프루스트의 마르셀이 알베르틴에게 품는 질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알베르틴을 가두려 할수록 그녀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녀의 과거가 궁금하고, 그녀의 친구들이 의심스럽고, 그녀의 웃음이 두렵다. 질투는 사랑의 부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엔진이다. 그리고 그 엔진은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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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교계라는 무대 — 허영과 계급의 해부학
소설의 상당 부분은 19세기 말~20세기 초 파리 상류사회의 살롱들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저녁 만찬, 베르뒤랭 부인의 소규모 모임, 오페라 극장의 귀빈석—이 공간들은 모두 계급과 허영이 작동하는 무대다.
프루스트는 이 세계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사교계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게르망트 부인에게 초대받는다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마르셀은 어린 시절 게르망트 공작 부인을 거의 신화적 존재처럼 흠모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세계에 들어간 뒤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빛나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공허함이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재치 있는 대화 뒤에는 권태와 계산이 있다.
이것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구별짓기』(La Distinction, 1979)에서 분석한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의 메커니즘과 정확하게 겹친다. 사교계의 인정은 경제 자본만으로 살 수 없다. 올바른 취향, 올바른 말투, 올바른 인맥, 올바른 문화적 참조—이것들의 총합이 상징 자본을 구성하고, 그 자본의 크기가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 프루스트는 이 메커니즘을 철학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보여준다. 독자는 마르셀의 눈을 통해 그 게임의 규칙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그 규칙을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자의성을 보지 못하는지를 목격한다.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 1894~1906)이 사교계를 두 쪽으로 가르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같은 살롱에서 유쾌하게 어울리던 사람들이 드레퓌스의 무죄냐 유죄냐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한다. 여기서 프루스트는 보여준다. 사교계의 연대란 얼마나 얇은 것인지를. 가치보다 이해관계가, 진실보다 편의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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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술이라는 구원 — 창조의 철학
소설 후반부에서 프루스트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술이다. 마르셀이 오랜 방황 끝에 도달하는 결론은 이것이다. 삶의 진실은 직접적 경험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만 온전히 드러난다.
왜 그런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습관에 덮여 있다. 매일 보는 거리, 매일 만나는 사람들—우리는 이것들을 실제로 보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 그런데 예술가는 다르다. 예술가는 이 습관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대상의 낯선 본질에 다시 접근하게 만든다.
소설 속 화가 엘스티르는 바다를 그릴 때 우리가 '바다'라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본 것을 그린다. 그 결과 그의 그림 속에서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해체되고, 배와 건물이 뒤섞인다. 처음 보는 사람은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움 안에서 우리는 잠시 습관의 눈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본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오스트라네니에ostranenie)와 통한다. 빅토르 쉬클롭스키(Viktor Shklovsky, 1893~1984)는 「기법으로서의 예술」(Iskusstvo kak priём, 1917)에서 예술의 목적이 지각의 자동화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서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예술은 그 자동화를 멈추게 하고 다시 보게 만든다.
프루스트에게 이 예술적 인식은 구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시간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 그러나 예술은 시간에 의해 파괴된 것들을 언어와 형식 안에서 영속시킨다.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바로 그 구원의 실천이다. 마르셀이 마침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 소설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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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의식의 흐름 — 문장이 시간이 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는 독자들은 흔히 당혹감을 느낀다.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다른 생각이 또 다른 기억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문장이 반 페이지를 채우기도 한다. 이것은 서투름이 아니다. 그것은 프루스트가 의식의 실제 작동 방식을 모방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이다.
이 기법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고 부른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에서 의식은 사물처럼 고정된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강과 같다고 했다. 의식은 단절 없이 이어지고, 현재의 생각은 과거의 잔향을 담은 채 미래로 흘러간다.
프루스트의 긴 문장들은 바로 이 의식의 흐름을 언어로 포착하려는 시도다. 독자가 그 문장 안에서 길을 잃는 것은 사실 의도된 경험이다.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도 우리는 종종 길을 잃으니까.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그 경험. 프루스트의 문장은 그 경험을 읽는 행위로 만들어낸다.
이것은 같은 시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율리시스』(Ulysses, 1922)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소설들과 함께 모더니즘 문학의 핵심 기법이 된다. 외부 세계의 사건보다 내면 의식의 흐름을 서사의 주체로 삼는 것. 프루스트는 이 혁명의 가장 장대하고 지속적인 실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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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죽음과 망각 — 사라지는 것들의 무게
소설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할머니의 죽음, 베르고트의 죽음, 스완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 파티에서 마르셀이 마주하는 친구들의 노화와 죽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의 파티에 참석한 마르셀은 공포를 느낀다. 그들이 이상하게 분장한 것처럼 보이다가, 그것이 분장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임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프루스트가 시간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말하는 순간이다. 시간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시간은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다. 한때 아름다웠던 사람이 늙고, 한때 강했던 사람이 쇠약해지며, 한때 살아있던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과 함께, 그 사람을 알았던 내 안의 나도 조금씩 죽는다.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는 "우리가 있는 한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으면 우리는 없다"(Epistula ad Menoeceum)고 말했다.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소설이 보여주는 죽음의 공포는 다른 종류다.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 그리고 그 타인과 함께 사라지는 나의 일부에 대한 슬픔이다.
할머니가 죽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 중 하나다. 마르셀은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뒤에도 당장은 큰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은 한참 뒤에야, 불쑥 찾아온다. 비자발적 기억처럼. 할머니와 관련된 어떤 감각이 방아쇠를 당길 때. 그제야 그는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안다. 슬픔도 기억처럼, 의지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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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금 여기서 — 스마트폰 시대의 비자발적 기억
프루스트가 소설을 쓴 지 100년이 넘었다. 그 사이 세계는 극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프루스트가 문제 삼은 것들은 더욱 첨예해졌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많이 기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매 순간을 포착하고, SNS에 기록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한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프루스트적 의미의 기억인가.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이 살아나는가, 아니면 사진이 기억을 대체해버리는가. 우리는 혹시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함으로써 기억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내적 시간 의식(inneres Zeitbewusstsein)을 분석하면서, 과거가 현재 안에 파지(retention)의 형태로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것은 머릿속 파일이 아니라 현재 의식의 살아있는 일부다. 그러나 우리가 스마트폰에 의존할수록, 이 살아있는 파지는 약해지고 외부 저장 장치에 의존하게 된다. 기억이 아웃소싱된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는 아무 기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맛이었다. 그 맛이 수십 년을 건너뛰어 과거를 되살렸다. 지금 우리에게 마들렌 과자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화면을 통해 삶을 기록하고 있는가.
프루스트의 물음은 여기서 가장 날카롭게 현재를 찌른다.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클라우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몸과 감각 안에 잠들어 있다. 다만 깨울 줄을 모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