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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을 정초하게 된 근본은 어디에 있었을까?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유진 오닐의 희곡 그리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준 그 원류는 어디일까? 철학, 희곡, 정신분석학의 원류가 ‘하나’임을 전제한, 이 이상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리스 비극’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그리스 비극은 모두 33편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7편, 소포클레스의 작품 7편, 그리고 에우리피데스가 남긴 19편의 작품이 전한다. 비록 40편도 안 되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이 왜 인류 문화사의 거대한 뿌리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4월. 겨울이 찬바람을 거두어 간 후, 세상이 새순의 초록으로 휩싸이는 달. 농한기가 끝나고 다시 생산과 수확의 계절이 시작되는 달. 그리스인들은 겨울부터 3월까지, 4월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를 열었다. 이 제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당연히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수확을 상징하는 풍요의 신이었으니, 차가운 겨울동안 굶주린 그리스인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신일 터다. 게다가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기도 하다. 그러니 디오니소스보다 축제에 어울리는 신이 있을까. 당연히 4월의 제전은 그를 위한 축제일 수밖에 없다.
이 제의를 디오뉘시아(Dionysia) 축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디오뉘시아 축제의 백미는 그리스 시인들이 참여하는 ‘비극 경연대회’다. 3일간에 걸쳐 진행되는 비극 경연대회에서는 3명의 비극 시인들이 작품을 상연한다. 이 경연대회를 관람한 사람이 약 1만 7000명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는 오늘날 그 어떤 축제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1만 7000명이 관람하는 이 거대한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시인들의 큰 영예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이 바로 이 대회에서 우승한 최고의 시인들이다.
우리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등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고리타분한 옛날 작가라고 고개를 흔들기 쉽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당대의 그들은 만여 명을 현장에서 매료시킨 최고의 작가였다. 소포클레스는 자그마치 18회나 우승했고, 아이스퀼로스는 13회 우승했다. 오늘날 어떤 작가와 이들을 비견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 비극은 고대인의 축제에서 가장 화려한 메인이벤트를 담당했으며, 인류 문화사의 수많은 영역을 관통하는 ‘사유의 원류’다. 이 강의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을 곱씹어 가며, 서양 정신이 도달한 가장 깊은 고통의 심연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그리스 비극이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 양상을 겪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 이 작품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조명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니체가 매료되었던 디오니소스. 프로이트가 집요하게 추적한 오이디푸스. 그리고 연극과 영화의 이면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흔적.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만나자.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
서울대 불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다시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연구로 두 번째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과정 수료 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제2대학에서 『대중 앞에 선 로고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시학에서("Logoi devant la foule" - La rhetorique et la poetique selon Aristote)』로 서양고대학(Sciences of Antiquity)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지대에서 동서문화교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서울대, 경희대, 숭실대, 한국외대, 서울교대, 서울디지털대 등에서 강의해 왔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 및 정암학당 연구원으로, 서양고대 문학과 철학, 수사학에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