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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앞에 있는 삶과 현실의 구체성에 정신이 팔려 있다. 하지만 삶과 현실이 숨기는 허구와 우연의 세계를 엿보는 순간, 현실이란 구멍 나고 찢기기 쉬운 천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의미의 충만함에 들떠 있는 자를 무릎 꿇게 하는 데에는 한 방울의 허무로 충분하지 않을까? 의미와 무의미가 얼굴을 맞대고 있다면 밝고 투명한 의미만으로 빛과 어둠이 혼재하는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가?
현실과 진리를 재현하는 문학이 아니라 허구와 역설로 창조한 세계는 어떤 것일까? 보르헤스는 허무와 우연으로 빚은 투명하고도 어두운 가상현실로 우리 삶과 예술의 이면을 제시한다. 그의 거울에 비친 세계는 가장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더없이 구체적이다. 그는 현대 예술과 철학이 찾는 모든 주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수수께끼는 삶과 예술의 뒤얽힘을 풀어나갈 안내자이다.
그는 우리를 미로로 안내하고 우리가 그곳을 빠져나오길 기다린다. 아리아드네의 실이 보이지 않는가? 또한 보르헤스의 미로는 무한성을 즐기고 새로운 의미의 장을 조직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르헤스가 안내하는 세계-도서관에서 진리를 온전하게 담고 있는 '한 권의 책'을 찾고 있다. 당신은 그 책을 찾았는가?
보르헤스의 『픽션들Ficciones』과 『알렙Aleph』은 20세기를 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기를 기획하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의 단편집은 미래의 문학을 자아내는 물레가 아닌가? 보르헤스의 미로에서 끝없는 소설의 재미와 새로운 구성의 놀이에 취하고 싶지 않은가? 약간 취한 상태에서 바벨 도서관장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당신을 이 도서관의 사서로 임명하오! 소문으로 전해오는 그 한 권의 책을 부디 찾아주시오"
양운덕(철학자)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헤겔 연구(「헤겔 철학에 나타난 개체와 공동체의 변증법」)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구 근·현대 사회철학에서 전개된 개인과 공동체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면서, 최근에는 질서와 무질서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복잡성의 패러다임(모랭), 헤르메스적 인식론(세르), 자율과 창조성의 원천인 ‘상상적인 것’(카스토리아디스) 등을 공부하고 있다. 연구실 ‘필로소피아’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철학과 문학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이 있게 소화하기 위한 모임과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