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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지젝의 도발적 메시지
지젝을 바라보보는 라클라우의 견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라클라우가 쓴 지젝의 책 서문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의 대가 라캉의 연구가 발칸반도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라는 작은 국가에 이르러서 라틴권이나 영미권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반성을 위해 사용됐다고 한다. 오늘날 슬로베니아에서 라캉의 이론은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른바 ‘슬로베니아의 봄(최근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 당시에 주요 참조점 중 하나였다.
이들의 특징은 첫째,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장(ideological-political field)을 지속적으로 참조한다. 슬로베니아 학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 메커니즘(동일시, 주인 기표의 역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을 꾸준히 기술하고 이론화한다. 전체주의의 특징과 그것의 다양한 변주(스탈린주의, 파시즘)들을 규정하고 동유럽 사회에서 나타난 급진적 민주주의 투쟁들의 주요 특징을 그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철학의 고전을 분석하는 데 라캉의 범주들을 이용한다. 이들의 독특한 ‘묘미’는 그들의 헤겔 지향적인 성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헤겔 철학에 대해 새로운 독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른바 헤겔의 범-논리주의라는 기존의 전통적 가설이나, 그의 사유의 체계성은 이성의 최종적인 매개를 통해 모든 차이를 제거하게 된다는 해석 등을 넘어선 독법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서문 中에서)
『이데올로기의 숭엄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이데올로기의 숭엄한 대상』은 이데올로기 전반에 관한 날카롭고 창의적인 지젝의 사유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기존에 계급적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연구를 진행한 알튀세르주의를 비판한 그 해석의 흥미로움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지젝에 따르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의한 주체의 호명을 지적한 것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여기서 알튀세르가 놓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호명 사이의 연관 관계를 지적한다.
지젝이 보기에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의한 호명은 100%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엄격한 훈육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 완벽하게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것 같지만, 이내 ‘이거 이데올로기네’하며 투쟁과 갈등을 벌인다. 알튀세르가 인정하지만 놓치거나 충분히 사유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영어로 쓰인 덕분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그런데 강사의 말에 따르면 제목에 오류가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번역된 제목은 ‘of’ 의 해석을 두고 저자가 고민을 했을 거라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소격이냐 혹은 여격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스스로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게 작동해서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숭엄한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자본, 매력, 노동력을 물신의 위치에 올려놓는 작동 원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는 소격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그림자처럼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데 타당하다는 지적이다.
마르크스의 마술, 지젝의 마술 이해
마르크스는 상품이 상품으로 변하는 방식 혹은 흙이 상품으로 변하는 방식을 두고, 자본주의가 어떠한 마술을 부려서 흙을 돈으로 바꾸는가를 분석한다. 그는 자본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지젝은 꿈이 꿈으로 변하는 방식을 라캉의 사유를 빌려 분석한다.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과 구조적 상동성을 갖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잉여 가치 생산 과정이 드러나듯이, 지젝은 잉여 가치를 뒤집어 욕망의 잉여 쾌락과 확대 생산을 분석해내고, 이를 갖고서 자본주의 대중문화를 해석한다.
두 경우 모두 요점은 형식 뒤에 숨겨져 있다고 추정되는 '내용'에 대한 물신적인 현혹을 피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분석을 통해 밝혀져야 하는 '비밀'은 형식이 숨기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부리는 마술이라고 표현되듯 자본이 상품으로, 상품이 자본으로 되는 것과 같이, 정신분석의 틀을 빌어 분석하는 욕망의 비밀은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욕망을 확대 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핸드폰이라는 숭엄한 대상
테크놀로지는 현대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등에 업혀 숭엄한 대상이 된다.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 되는 매력들, 성적 욕구, 돈 등은 테크놀로지가 동원되면서 숭엄한 대상이 된다. 이데올로기의 숭엄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매개된 욕망들은 실제 얻은 욕망과는 차이가 발생한다. 내가 상상한 욕망과 현실과의 틈새에 괴리가 생기고 잉여가 생긴 것이다. 잉여를 채우기 위해서 반복이 시작된다. 만족은 없다. 때문에 욕망은 반복된다.
예컨대 광고에서 본 세련된 핸드폰을 사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거나 부모님에게 조른다. 핸드폰은 단지 전화를 거는 기계 이상의 의미로 광고를 통해, 타자를 통해 재구성되고, 숭엄한 대상으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핸드폰을 움켜쥔 순간, 핸드폰은 고물이 된다. 충족되지 않는 잉여를 채우기 위해 나는 새롭게 유행하는 핸드폰을 또 다시 욕망한다.
이 강좌는 지성사적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스스로 보지 못한 먼 곳을 보기 위한 강좌이다. 난장이가 올라탔다고 해서 거인이 피곤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거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으면 더욱 좋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풍부한 위트와 풍자로 이해를 도와주는 이윤성 선생의 어깨에 올라탄다면 부족한 부분을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성(영문학, 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폴 드만의 알레고리론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영어학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