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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슈미트 vs 아감벤 :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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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철학입문슈미트 vs 아감벤 :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강좌정보
강신주의 저서 『철학 vs 철학』 중에서 삶을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여덟 가지 테마를 골라 논의한다. 이 강의는 자신의 삶을 이전보다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900쪽이 넘는 방대한 양과 동서양 철학을 한꺼번에 다루는 넓은 스펙트럼. 여태껏 이런 철학사 책은 없었다. 책의 구성은 각 테마에 따라 ‘철학자 VS 철학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철학사 책은 없었지만 그간 아트앤스터디의 강신주 선생을 눈여겨본 회원에게는 꽤나 낯익은 구성일 것이다. 책 안에는 강신주 선생의 입을 통해서 들어본 철학자들도 있을 테고, 비교적 생소한 철학자들도 있다. 이번 강좌에서는『철학 VS 철학』중 현대 철학자 16인이 바라본 현대인과 현대사회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해본다. 책에서 느낄 수 없는 소통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철학을 강의실에서 느껴볼 좋은 기회이다.



1강 : 버클리 vs 들뢰즈: 인간의 유한성은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신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한자이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고 보완해줄 타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 타자가 철학자 버클리에게는 다름 아닌 '신‘이었다. 하지만 들뢰즈는 버클리의 ’신‘ 대신 삶에서 만나는 세속적인 타자를 그 자리에 도입한다. 사실 내가 결코 볼 수 없는 등 뒤의 보푸라기도 쉽게 볼 수 있고 내가 직접 내려다보기 어려운 코도 가볍게 쳐다볼 수 있는 것 역시 세속적인 타자가 아닌가? 


2강 : 칸트 vs 니체 : 우리가 보는 세계는 모두 동일한가?

“안경으로 바라본 세계와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 중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일까? 이런 의문에 대해 칸트는 안경으로 보든 혹은 맨눈으로 보든, 어느 경우에서든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진정한 세계란 우리가 무엇으로 보는지와 관계없이 무관하게 존재하는 물자체의 세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니체는 두 세계 모두 진정한 세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니체는 안경으로 바라본 세계와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 가운데 어느 것이 과연 우리 삶이 가진 힘에의 의지’에 더 잘 부합하는지 되물어볼 것이다. 


3강 : 하이데거 vs 메를로 퐁티 : 마음이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을까? 오히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할 때는 습관적으로 영위하던 친숙한 세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이 아닐까? 형광등을 의식할 때에는 그것이 고장났을 때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스승인 후설을 괴롭힌 사람이 하이데거였다. 한편 마음의 지향성 자체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신체적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던 또 다른 철학자가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메를로-퐁티였다.


4강 : 사르트르 vs 알튀세르 : 인간에게 자유는 가능한가?

사르트르가 인간에서부터 사회와 역사로 나아갔다면, 알튀세르는 사회와 역사로부터 다시 인간에게로 나아가고 있다. 알튀세르는 우리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하나의 주체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하나의 노예로 구성되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 논의에 따르면 인간에게 자유의 가능성은 것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정한 진단에도 치유의 희망이 따르는 법이다. 과연 알튀세르는 어떠한 전망을 제시할까?


5강 : 러셀 vs 크립키 : 고유명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러셀은 자연수를 집합 개념을 통해 정의하려고 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집합으로 환원하려고 했던 인물로 유명했다. 1은 공집합 {}로 표시되고, 2는 {1}={{ }}로 표시되고, 3은 {2}={{{ }}}로 표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자연수를 수많은 중첩된 공집합 기호들로 환원하려는 러셀의 시도가 사실 고유명사를 복잡한 기술구들로 환원하려고 했던 그의 시도와 구조적으로 같다는 점이 매우 이채롭게 보인다. 


6강 : 헤겔 vs 바디우 : 사랑은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인가?

헤겔의 불행은 비대칭적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로, 혹은 ‘한 됨’을 통해 이 차이를 미봉하려고 했던 데 있다. 사랑 앞에서 쩔쩔매며 서둘러 결혼과 가족 제도에 의존해 차이를 미봉하려 했던 헤겔의 비겁함이 바로 이로부터 유래한다. 반면 바디우는 우리에게 비대칭적 차이를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더라도 “끈덕지게 견뎌 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7강 : 포퍼 vs 쿤 : 과학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현실적인 주체 이면에 유동적인 욕망의 힘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들뢰즈, 모든 시대에는 무의식적인 사유 규칙으로서 에피스테메가 존재한다고 폭로한 푸코. 이러한 사유 경향은 과학사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포퍼처럼 과학의 역사를 인간의 투명한 이성, 혹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전개과정이라고 이해한 순진한 철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토머스 쿤에 의해 과학의 역사도 과학자가 의식하지 못한 일종의 사유 규칙, 즉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곧 밝혀진다.


8강 : 슈미트 vs 아감벤 :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적과 동지를 설정할 수 있는 초법적인 권한을 가진 주권자의 역량을 강조했을 때, 슈미트는 어떻게 하면 개체들의 힘을 빼앗아 주권자에게로 집중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푸코와 아감벤 이런 길들여진 주체, 혹은 무력감에 빠진 주체에게 다시 힘을 찾아주고자 한다. 물론 그 방향은 개체들이 자신의 힘을 유지하면서 연대를 도모하는 ‘자유로운 공동체’, 즉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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