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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롤랑 바르트를 이해해보자
1977년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가 사망했을 때 바르트는 자신이 양자택일 앞에 서 있음을 알았다. 생의 마감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의 시작인가. 이 양자택일을 앞에 두고 바르트는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부터 자신의 애도 작업을 노트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남겨진 유고가 어머니의 사망과 바르트 자신의 사망 사이 2년간의 기록인 『애도 일기』다.
우리는 『애도 일기』를 통해 바르트의 사적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바르트의 공적 활동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적 영역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어머니의 상실 즉 사랑의 상실로 인한 바르트의 절망적 멜랑콜리를 바라볼 수 있다.
『애도 일기』는 아주 짧은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기록에 날짜가 붙어 있어 형식적으로는 일기이지만, 통상적인 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일기는 내면적 자아가 화자가 되어 글을 쓰는 것이지만, 『애도 일기』는 내면적 자아가 허물어져 가는 과정과 새로운 자아를 찾아나가는 이중의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일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일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가? 『애도 일기』는 어떤 의미에서, 바르트가 쓰기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소설 『비타 노바』(Vita Nova)의 근본적인 자료에 해당한다. 바르트는 『애도 일기』를 밑그림으로 소설이나 에세이 등의 형식을 창출해내려고 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애도 일기』는 바르트의 이러한 의도와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바르트가 『애도 일기』를 가지고 한 편의 소설 혹은 에세이를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하면서 읽어야 한다. “과연 어떠한 소설과 에세이가 나왔을까?” 하는 질문을 바르트의 지적 행로와 연결시킬 때, 우리는 바르트가 이 텍스트에서 추구했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상실과 애도의 문제 "슬프기만 한 수많은 아침들"
『애도 일기』가 일기라는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상 이 기록들은 순간순간 죽음 충동처럼 내습해서 육체에 각인되는 문장들이 사진처럼 찍혀서 남겨진, 언어의 스냅 사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짧고 단순한 이 날것의 문장들은 그 직접성 때문에 한편 무의미하지만, 다른 한편 농익어 이제 곧 과육과 과즙이 누설되고 말의 과일처럼 의미들로 만숙하다. 물론 파열되어 흘러나오게 될 과육과 과즙의 의미들은 불투명하고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과일의 이름은 분명하다. 그건 슬픔,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절대 기호로서의 슬픔이다. 절대 기호인 슬픔 - 그것은 애도/멜랑콜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슬픔, 사랑과 죽음 사이를 떠나지 않는 슬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이 글을 통해 전개했던 ‘슬픔이라는 애도 작업’의 끝에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상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한 애도의 과정 후에 도달하게 되는 ‘슬픔의 끝’이며, 어떤 지고한 상태, 말하자면 죽은 어머니마저 대수롭지 않아지는 상태이다. 이를 언어화하기는 힘들지만, 사진은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또 한편 사진은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말로 풀어내는 것이 문학이며, 따라서 바르트에게 문학은 사진에서 태어난다.
이별은 많은데 애도는 없는 이 시대, 에고의 글쓰기에서 헌정의 글쓰기로!
우리 시대의 삶은 어떤가? 우리는 살아갈수록 세상의 많은 것들과 수없이 이별하고 살지만, 정작 ‘슬퍼하는 것’ 즉 애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애도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는 삶이다. 애도 작업을 끝낸다는 것은 무덤을 만들어주는 일이며, 그 무덤은 문자와 글쓰기로 짓는 무덤이다.
에고(ego)의 글쓰기와 헌정의 글쓰기라는 두 글쓰기 형태 중 이제 우리는 헌정의 글쓰기로 이행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에고의 글쓰기에 해당한다. 이제는 에고의 글쓰기에서 애도 작업에 해당하는 헌정의 글쓰기로 이행해야 한다. 즉 글쓰기는 이렇게 헌정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제 바르트의 『애도 일기』와 함께 ‘슬픔’을 깨닫고, 에고의 글쓰기에서 헌정의 글쓰기로 건너가보자.
김진영(인문학자, 철학아카데미 대표)
고려대 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University of Freiburg)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미학을 전공하였다. 바르트, 카프카, 푸르스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을 넘나들며, 문학과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수강생들로부터 ‘생각을 바꿔주는 강의’, '인문학을 통해 수강생과 호흡하고 감동을 이끌어 내는 현장', ‘재미있는 인문학의 정수’라 극찬 받았다. 또한 텍스트를 재해석하는 독서 강좌로도 지속적인 호평을 받았다. 현재 홍익대, 중앙대, 서울예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사)철학아카데미의 대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