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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할수록 나는 더 죄인이다"
레비나스의 삶과 윤리철학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유대인 출신으로, 러시아의 변방 국가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독일에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공부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은퇴했다. 그 과정에서 20세기 최고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가족 대부분을 잃었고, 통역장교로 2차대전 때 복무하던 중 유대인인 것이 밝혀져 가스실로 끌려간다. 레비나스는 이 폭력의 한복판에서 희생자 역할을 숙명적으로 맡게 된다. 유대인 레비나스의 이 폭력적 경험은 그의 철학에 고통의 흔적을 남겼고, 이 고통은 그가 윤리학을 제1철학의 자리에 두도록 이끌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의 고통, 나아가 인류 보편의 고통으로까지 확장시킨다.
ⓒ Bracha L. Ettinger/ Wikimedia Commons
네 문화와 함께한 디아스포라 철학자
레비나스는 여러 가지 정체성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다양한 인생을 경험을 한다. 이는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설명해준다. 유대인으로서 읽은 성서, 러시아에서 태어나 접한 러시아 문호들의 작품, 또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영향을 받은 후설의 ‘현상학’, 스스로에게 가장 의미 있고, 철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밝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의 사유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
레비나스, 하이데거를 비판하다
-죽음의 문제 비판 : 『존재에서 존재자로』
하이데거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죽음을 자기 사유 속으로 끌어당긴다. 즉, 하이데거의 죽음은 막연하고, 느껴지지 않은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마주하지 않으면 경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는 죽음을 하나의 예상된 이야기로 봤기 때문에 허구’라고 비판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수용소에서 직접 죽음을 마주한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책으로 낸 것이 『존재에서 존재자로』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쓰인 이 책은, 타자(他者)를 동일자(나)로 환원하려는 서양 존재론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 경험을 근거로 전체성의 철학을 비판 : 『전체성과 무한』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철학 안에 헤겔로부터 넘어온, 전체성을 향한 추구를 비판한다. 2차 세계 대전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동안 진리라고 규정했던 것들을 전체성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는 무한히 바뀌어나가는, 잡히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자기네들이 생각하고 규정한 것을 전체로 놓는 것을 비판한다. 그래서 전체를 벗어난 나머지 사람들을 탄압하고 억압, 제거하는 것, 바로 독일이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배제시키려 한 것, 또 학문에서 자신이 구축한 이론 체계만을 ‘진리’라고 하고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 이런 것을‘도그마(독단)’이라고 비판한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은 레비나스
근대 독일에서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까지 이어지는 주체철학은 주체가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문제 삼는다. 레비나스는 타자란 주체가 함부로 하거나, 다스리거나, 자기 생각 속으로 끌고 올 수 없는 ‘영원한 타자’라고 본다. 즉, 주체라는 것이 타자를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거나, 자신의 도그마만 일방적으로 선포할 수 없다. 이 바깥에 있는 타자는 영원히 자기 안으로 담아낼 수 없는 타자이다.
레비나스가 가스실 앞에서 죽음과 삶 사이를 넘나들 때, 당시 존경받는 대학교수였고, 지식인이었던 그는 독일군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위협 때문에 온갖 종류의 굴욕을 당한다. 그 순간 독일 사회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종전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독일 병사에게 창을 들고 당한 만큼 복수하려 들 때, 레비나스는 오히려 그들을 막았다. 그 때 ‘독일 병사, 독일 사회의 잘못이 아니다’고 말한다. 독일 사회에서 잘못 살아왔던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반성한다. 독일 사회에 적대 관념을 심어준 유대인의 삶을 뒤돌아보지 못했다는 것, 앞서 깨달은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 그 책임이 너가 아니며, ‘나라’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철학은 신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게 사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적 측면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을 윤리철학이라고 한다.
사랑, 고통, 삶, 타인의 마음을 '얼굴'로 읽는다!
얼굴이란 모든 주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통로이다. 그리고 얼굴을 통해서 다른 주체와 자기가 만나게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이란 ‘마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을 대면한다는 것은 얼굴의 생김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소리에 귀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다. 즉, 내 안을 나의 생각으로 가득 채우지 않고, 듣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윤리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 죄책(罪責)의 문제에 있어서 의지가 발동되는 것에 한해서 책임을 느낀다. 현대 윤리는 사람이 자발적인 의지로 일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따져서, 그 의지에 의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지도 않고, 그것에 의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런 의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무한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볼 때,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배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한책임이라는 관점에서는 현상이 아닌 가려진 것, 말해지지 않는 것, 그래서 우리 속에 드러나지 않는 것, 이것을 같이 볼 때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모든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끝없이 확장하는 의미에서 무한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나의 윤리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마주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무한이다.바로 이것이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일생을 무한한 의미 탐구와 무한한 책임의 연속으로 일관한 레비나스를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박남희(연세대 철학연구소 전임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