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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죽음)·에로스(사랑), 그 경계를 넘어서
들뢰즈가 말하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죽음욕동을 넘어서: 들뢰즈의『차이와 반복』읽기 2>는 들뢰즈의『차이와 반복』중 죽음본능(죽음욕동death-drive)에 대해 진중한 사유를 해보는 강좌이다. 프로이트의『쾌락원칙을 넘어서』의 텍스트를 검토하면서, 쾌락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들뢰즈의 관점과 비교해 가며 살펴보도록 하자.
쾌락이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차이와 반복』에서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바탕으로 삶, 죽음, 운명의 문제를 논한다. 특히 죽음의 문제를 논할 때 프로이트의『쾌락원칙을 넘어서』의 쾌락원칙, 자아욕동(Ichtrieb), 성욕동
(Sexualtrieb), 삶욕동에 대한 개념을 면밀히 살핀다.
자, 그렇다면 쾌락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쾌락이란 의식주가 해결됐을 때 느끼는 만족이 아닌가? 그러나 진정 의식주의 해결에서 느끼는 것이 쾌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만족이 아닐까?
프로이트는 쾌락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사소하게 벌어지는 작은 충격들, 혹은 미세한 강도의 차이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맞닥뜨렸을 때 작게나마 혼동을 겪게 된다. 즉, 들뢰즈가 말한 바, 열 · 밝기 · 충격 등의 여러 가지 강도차는 프로이트의 자극 · 흥분(excitations)의 장이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흥분 개념은 들뢰즈에게서 강도론(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사소한 차이)의 일부로서 다루어진다는 점을 우선 기억하자.
프로이트는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는 이 흥분들이 심리생활의 기본적인 요소들이라 보았으며, 이 흥분들의 해소를 쾌락(Lust)이라고 규정했다. 쉽게 말해 배고픔의 충족, 수면의 충족등이 쾌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쾌락은 빨주노초파남보 차곡차곡 정리된 서랍장에서도 온다!
반대로 흥분에서의 강도차(强度差), 즉 평온한 일상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닥뜨린 충격이랄지, 자신의 행동반경과 생활패턴에서 벗어나는 작은 차이들이 우리에게는 불쾌한 긴장을 유발한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리고 이 차이의 해소야말로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 보자.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들로 구분된 서랍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빨강색 서랍엔 필기구들을 모아 놓고, 주황색 서랍엔 떨어진 단추들과 반짇고리를 정리해두며, 마지막 보라색 서랍엔 양말을 놓아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친척동생이 놀러와 체계적으로 정이된 서랍에 아무렇게나 물건을 넣어버린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에서 불쾌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라면을 먹는 경우에도 평소 자신이 먹던 방식과는 다르게 끓인 라면은 어쩐지 거북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두 번은 해봤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이 다소 비약적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렇게 사소한 만족(안정감) 또는 습관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는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흥분과 쾌락의 장(場) 전체를 "이드(id=Es)"로서 개념화했다.
자아 · 초자아(超自我)와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또는 한 영역. 이것은 본능적 에너지, 리비도(libido)의 저장고이며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함을 피하는 쾌감원리(快感原理)만을 따른다.
들뢰즈의 프로이트 다시 읽기: 세계는 생성이다!
들뢰즈에게 세계는 근본적으로 말해 생성이다. 그러나 생성만을 강조한다면 거기에는 "흐름"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래서 생성을 대전제로 하는 존재론이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이론적 부담은 동일성들을 설명해 주는 일이다.
들뢰즈에게 "개체화의 장"이란 곧 어떤 흐름의 장이지만 단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 안에서 일정한 개체화가 성립하는 그런 장이다. 개체화란 그 어디에선가 극한들(limits)이 작동해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장이 개체화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장이 "차이생성( differentiation)의 장이어야 한다. 이 차이생성의 장에서 어떤 개체들이 "분화(differenciation)"를 거쳐 성립한다.
새롭게 분류된 빨주노초파남보 서랍장: 차이는 생성을 만든다!
다시 빨주노초파남보의 서랍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친척동생이 놀러와 체계적으로 정리된 서랍장에 아무렇게나 물건을 놓았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생도 자신의 기준에 맞게 색색의 서랍에 각기 다른 물건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불쾌는 단순히 쾌락의 반대로서가 아닌 너와 나의 혹은 더 나아가 자아와 타아의 차이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생의 분류방식을 인정했을 때, 즉 동생과 자신의 차이를 인정했을 때, 빨주노초파남보의 서랍장은 다른 분류방식을 생성하게 된다. 필기구만 모아놓던 빨강서랍엔 필기구와 함께 메모장을 함께 놓아두게 되고, 반짇고리를 정리해 두던 주황색 서랍엔 그것들과 함께 가위, 칼 등 연장들을 함께 정리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규칙적인 습관에서의 이탈은 처음에는 흥분과 불쾌감으로 전해지지만, 이탈이 차이로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과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와 친척동생간의 빨주노초파남보 서랍장 분류기준은 단순히 나만의 것도 동생만의 것도 아닌 독립적이고도 통합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삶 본능과 죽음 본능: 죽음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이 죽음욕동에 의해서만 구성된다는 생각이 무리한 가설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죽으려고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살려고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반복강박과 죽음욕동이 "자아욕동(Ichtrieb)"에만 해당할 뿐 "성욕동(Sexualtrieb)"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연 죽음욕동 · 자아욕동과 삶욕동 · 성욕동은 대극적인 두 쌍인가?
인간의 원시적 비인격적 무의식충동(이드)의 욕구가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긴장을 벗어나고 고(苦)를 피하려고 하는 쾌원리(快原理)를 좇아 작용할 때, 의식의 표면에 발생하는 것이 자아이다. 자아란 원시적 충동과 현실의 외계와의 중개자이다. 또한 사회적 규범에 따라 주어지는 상벌 ·금지 등에 의하여 개인의 내부에 정사(正邪)의 의식이 생기고 그것이 자아를 비판한다.
동기(動機) 혹은 동인. 생물의 생명유지·종족보존과 같이 생물학적 의의를 현저하게 갖는 충동 즉 굶주림· 갈증·성(性)·고통의 회피 등을 1차적(또는 생물적) 동인이라 하고, 타인에 대한 우월· 칭찬·경쟁·협력, 사회적 승인·집단적 귀속 등에 대한 욕구를 2차적(또는 사회적) 동인이라 한다.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의사인 프로이트는 사랑 · 미움에 대해서도 병리적으로 접근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욕동에는 사디즘이 함축되어 있다. 특히 이 사디즘이 죽음욕동과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대상을 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디즘적 본성이 어떻게 생명의 보존자인 에로스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죽음욕동은 성적 기능에 봉사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곧 사디즘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에게 사디즘은 죽음욕동을 잘 보여주는 예로서 기능한다. 이에 비해서 마조히즘은 주체 자신의 자아에게로 되돌아온 사디즘으로 이해된다. 욕동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이런 경우는 욕동의 과정에서 초기 단계로 돌아가는 것(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디즘이란 일종의 미움이기에, 결국 프로이트에게는 성육동이나 사랑보다 죽음육동과 미움(사디즘이든 마조히즘이든)이 더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정신분석학 자체도 또 이 담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gloomy"한 것이 이 때문일까?
쾌락원칙을 넘으면 무엇이 있을까?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반복강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쾌락원칙을 위태롭게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이 함축하는 불쾌 역시 근본적으로는 쾌락원칙과 양립한다고 본다. 나아가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은 실제로 죽음욕동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봉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쾌락원칙은 그것보다도 더 큰 쾌락원칙인 죽음욕동에 봉사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죽음욕동은 쾌락원칙보다 더 상위의 원리라는 뜻일까?
그러나 더 상위라 해도 죽음욕동 역시 쾌락원칙에 배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쾌락원칙"을 넘어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으로서 죽음욕동이 제시되었지만, 죽음욕동은 진정 쾌락원칙"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일까?
들뢰즈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던졌던 기본적인 화두는 이것이다: 쾌락원칙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기본 원칙인데, 왜 어떤 사람들은(나아가 인간 일반은) 불쾌한 긴장 · 기억을 자꾸 반복하려 하는가?" 핵심 화두는 바로 "반복강박"이다. 프로이트는 이 문제에 답하면서 "에로스(사랑)와 타나토스(죽음)"의 가설까지 나아갔다.
이에 비해, 이 물음에 대한 들뢰즈의 대답은 이것이다: 이러한 반복강박은 수동적 종합이 쾌락원칙의 조건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쾌락원칙"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습관에서의 반복, 수속의 수동적 종합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빨주노초파남보 서랍장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친척동생과 나의 서로 다른 분류 기준은 서로간의 불쾌감을 유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랍장의 분류 기준은 좀 더 효율적이고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쾌락을 넘어섰더니 우리는 일차적으로 불쾌한 감정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그 불쾌감이 단순히 한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었을 때, 불쾌의 감정은 차이를 인정하게 되고 그러한 차이는, 즉 동생과 나와의 서로 다른 분류방식은 새로운 또 하나의 분류법을 생성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정된 삶 속의 쾌락은 ‘차이’를 만났을 때, 불쾌감으로 변하게 되고, 그 불쾌를 넘어섰을 때, 우리는 새로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쾌락원칙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 무엇’의 정체가 아닐까?
‘프로이트를 읽는’ 들뢰즈의 용어들
쾌락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수동적 반복
수동적 종합은 두 차원에 걸쳐 일어난다. 흥분 · 자극이 어떤 요소적 반복의 수축이라면, 이 요소들이 리비도 집중, 수속, 통합을 통해서 보다 일반적인 · 원칙적인 수준에서 다시 종합된다. 이러한 수동적 반복이 2차의 응시-수축이 되는 것이다.
수속된 혹은 종합된 흥분∥욕동(pulsion=Trieb)
무의식의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묶기 즉 수속(收束)이다.("liaison"을 "con-
traction"의 번역어인 "수축(收縮)"과 운을 맞추어서 수속이라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수속을 통해서 흥분들이 묶일 때, 이드 안에는 하나의 자아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 자아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애벌레-자아이다. 그래서 이드란 국소적 자아들, 애벌레 자아들이 우글거리는 장(場)으로서 이해된다.
애벌레-자아들의 나르시시즘
들뢰즈는 자신의 기관들 중 하나를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나르시시즘 훨씬 이전에, 애벌레-자아들이 종합되는 과정 자체가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즉 사물들에게서 자기-이미지를 훔쳐낸다. 때문에 응시 자체가 일종의 만족 · 쾌락을 가져다주게 되고, 이 만족감은 "환각적" 만족감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아비투스의 역할
쾌락이 단지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원칙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수동적 종합을 통해서, 즉 습관(habitus)를 통해서이다. 이드의 조직화는 곧 습관의 조직화이다. 쾌락원칙은 현실원칙의 보조 하에 불쾌한 긴장을 낮추어 평형 상태로 이행한다.
이 강의는 들뢰즈의『차이와 반복』을 통해 죽음본능(죽음욕동death-drive)대한 진중한 고찰을 하는 강좌이다. 들뢰즈가 바라보는 프로이트, 베르그송, 라캉의 죽음과 쾌락, 기억, 시간에 대한 사유를 만나보자.
이정우(철학자, 경희사이버대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한 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교수, 녹색대학 교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경희사이버대 교수로, 들뢰즈 <리좀 총서>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해박한 지식으로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가로지르며, 철학과 과학을 융합하는 등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해 왔다.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